국군의 날 기념일로 시작한 시월, 잘 맞으셨나요? 어느새 가을의 한가운데에 도착해있습니다. 추분(秋分, 9월 22일)이 지나며 해 지는 시각이 점차 일러지고 밤은 훌쩍 길어졌네요. 창문을 살짝 열어놓으면, 그 틈에 선들바람이 들어와 옷으로 채 가리지 못한 얼굴과 목덜미, 손등을 기분 좋게 쓰다듬고 갑니다. 차츰 옷장 깊숙한 곳에서 두껍고 긴 옷가지들을 밖으로 꺼내놓아야겠습니다.
가을의 하늘은 유독 높습니다. 여름날보다 멀리에 놓인 구름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길을 한 겹 그윽하게 합니다. 과학의 설명은, 가을에는 기온이 낮아지고 습도가 떨어져 대기 중 수증기와 먼지 입자가 줄어들어 공기가 맑고, 빛의 산란이 줄어 시야가 선명한 까닭이라 합니다. 더불어, 가을에는 대기압이 높아져 대기가 안정되어 구름 형성을 억제하고, 태양의 고도는 낮아져 하늘색이 한 겹 진한 파란색으로 보이는 까닭이라 합니다. 그윽했던 눈길이 과학의 설명에 번쩍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무색해집니다. |
시월 첫 위클리 지관에서 다룰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인데, 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나누고자 하는 것은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과 믿음에 대한 성찰입니다. 과학의 세계관에서 가을 하늘은 여러 물질 작용으로 인해 인간의 눈에 더 높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물질로 구성된 자연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짙어가는 단풍나무가 가을바람에 흔들릴 때 마음도 따라 흔들리는 것은 과학의 서사가 아니지요. 매우 주관적인 심리 현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편상범 교수의 칼럼 <저 거대한 무덤은 무엇이란 말인가? ; 죽음의 서사에 관하여>를 통해 오늘날 합리성과 객관성을 대표하는 “(자연)과학”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려 합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진 시대적 통념과 상식에 물음표를 달아보는 시간이기를 글은 권합니다. |
저 거대한 무덤은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과 관련된 문화유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일 것 같습니다. 파라오의 거대한 무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노동이 필요했을까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대한 죽음의 성전을 세웠을까요? 피라미드를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피라미드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죽음'에 왜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았을까요?
과거의 인류,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과 오늘날 우리들의 죽음은 같지 않습니다. 죽음에 관한 과거 인류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종교이자 우주론인 신화적 세계관을 살펴봐야 합니다. 신화적 세계관의 특징 중 하나는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물질이 살아있다는 물활론(物活論)이나 물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을 믿습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나무도 산도 강도 바다도 모두 살아있고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흔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남아있지요. 제주도에 가면 ‘남근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반세기 전만 해도 신혼부부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신부가 그 바위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알려져있지요. |
죽음의 서사 생명의 서사
산도 바위도 강도 정신을 지닌 주체라고 보는 신화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의 문화’가 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나 (죽음에 관련된) 의례들이 이를 잘 보여주지요. 신화적 세계관을 지닌 옛 문화에는 과거 인류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죽음의 서사’들이 있습니다. 그 다양한 서사들의 공통점은 죽은 자의 삶이 사후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또 다른 삶이 전개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은, 그들이 죽음을 당혹스러운 사태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당혹스러운 문제에 설명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서사’는 그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화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태입니다. 산도 바위도 물도 만물이 살아있다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죽은 자가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생명의 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돌도 살아있는데 숨 쉬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사람의 삶이 끝나겠습니까. 그들에게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죽음의 서사는 죽음이라는 낯선 현상을 친숙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하나의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생명’입니다. 만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있으니까요. 그래서 죽음의 서사는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하데스(그리스 신화에서 죽음과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 저승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참된 관점은 과학적 관점이라고 믿는 오늘날 우리에게 죽음의 서사는 설명력이 없습니다. 죽음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연 세계는 본래 죽어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원자나 소립자를 살아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죽어있는 무기물의 세계가 자연의 본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유기체가, 생명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한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설명이 필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는 ‘생명 과학’이 있습니다. 도대체 저 죽어있는 무기물로부터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것이 우리의 물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서사’가 필요합니다. |
생명의 세계관 죽음의 세계관
신화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 문명 이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설명’되어야 하는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죽음의 서사와 함께 죽음의 문화가 생겨납니다. 죽음을 그들에게 친숙한 무엇, 즉 생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죽음의 서사’입니다. 죽음의 서사는 신화적 세계관이 생명의 세계관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만물을 생명의 관점에서 봅니다.
반면에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죽음은,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설명해야 할 것은 죽어있는 물질들에서 어떻게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은 물질세계의 법칙을, 엔트로피의 법칙을 이겨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우주에 널려있는 무기물의 세계,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근대과학적 세계관의 바탕은 죽음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생명 과학은 죽어있는 물질들로 생명을 설명하려는 노력입니다. 과학은 생명의 관점을 버리고 죽음의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야?’ 라고 묻는 여러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 신화적 세계관을 되살려 생명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자고요?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죽음의 서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인류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통념이나 상식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하는 과학이 인류 역사의 매우 특수한 시기에 형성된 관점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임은 분명합니다. 과학은 근대의 매우 특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성립된 학문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화와 과학이 갖는 관점의 차이를, 생명의 세계관과 죽음의 세계관의 차이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
각 지자체에서 가을철 불청객 은행나무 열매를 조기에 채취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도심의 가로수 길 위에서 바쁜 걸음을 옮기다 급격히 발걸음이 느려지며 ‘아, 가을이 왔구나’ 싶게 만드는 은행에서, 빨갛게 물들어 춤추듯 떨어지는 단풍잎에서, 은빛 향연을 펼치는 억새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경험하시나요?
편상범 교수가 설명한 ‘죽음의 서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에서도 펼쳐집니다. 아일랜드 민요로 알려진 <Danny Boy 아, 목동아(1913)>. 언제나 들어도 따뜻하고 순수하며 향수를 자극하는 이 곡은 선율의 그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노랫말에서 죽음의 이후의 세계관을 덤덤하게 펼쳐 보입니다. 가사의 일부입니다.
‘모든 꽃들이 시들어 죽고 나 또한 죽어 땅에 묻히면, 너는 돌아와서 내가 누워있는 무덤을 찾을 거야.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작 별인사를 건네겠지. 그리고 난 들을 거야. 내 무덤을 밝는 너의 발자국 소리를. 그러면 내 마음은 더 따뜻하고 편안해질 거야.’ |
음악은 대한민국 재즈 보컬리스트의 대모인 박성연 선생의 2020년 발매된 <With Strings>에 수록된 버전으로 감상을 추천해 드립니다. 어느 멋진 날의 연속인 시월 만드시길 바랍니다. |
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재)플라톤 아카데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2길 19 SK에코플랜트 15층 수신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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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기념일로 시작한 시월, 잘 맞으셨나요? 어느새 가을의 한가운데에 도착해있습니다. 추분(秋分, 9월 22일)이 지나며 해 지는 시각이 점차 일러지고 밤은 훌쩍 길어졌네요. 창문을 살짝 열어놓으면, 그 틈에 선들바람이 들어와 옷으로 채 가리지 못한 얼굴과 목덜미, 손등을 기분 좋게 쓰다듬고 갑니다. 차츰 옷장 깊숙한 곳에서 두껍고 긴 옷가지들을 밖으로 꺼내놓아야겠습니다.
가을의 하늘은 유독 높습니다. 여름날보다 멀리에 놓인 구름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길을 한 겹 그윽하게 합니다. 과학의 설명은, 가을에는 기온이 낮아지고 습도가 떨어져 대기 중 수증기와 먼지 입자가 줄어들어 공기가 맑고, 빛의 산란이 줄어 시야가 선명한 까닭이라 합니다. 더불어, 가을에는 대기압이 높아져 대기가 안정되어 구름 형성을 억제하고, 태양의 고도는 낮아져 하늘색이 한 겹 진한 파란색으로 보이는 까닭이라 합니다. 그윽했던 눈길이 과학의 설명에 번쩍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무색해집니다.
시월 첫 위클리 지관에서 다룰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인데, 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나누고자 하는 것은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과 믿음에 대한 성찰입니다. 과학의 세계관에서 가을 하늘은 여러 물질 작용으로 인해 인간의 눈에 더 높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물질로 구성된 자연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짙어가는 단풍나무가 가을바람에 흔들릴 때 마음도 따라 흔들리는 것은 과학의 서사가 아니지요. 매우 주관적인 심리 현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편상범 교수의 칼럼 <저 거대한 무덤은 무엇이란 말인가? ; 죽음의 서사에 관하여>를 통해 오늘날 합리성과 객관성을 대표하는 “(자연)과학”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려 합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진 시대적 통념과 상식에 물음표를 달아보는 시간이기를 글은 권합니다.
저 거대한 무덤은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과 관련된 문화유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일 것 같습니다. 파라오의 거대한 무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노동이 필요했을까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대한 죽음의 성전을 세웠을까요? 피라미드를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피라미드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죽음'에 왜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았을까요?
과거의 인류,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과 오늘날 우리들의 죽음은 같지 않습니다. 죽음에 관한 과거 인류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종교이자 우주론인 신화적 세계관을 살펴봐야 합니다. 신화적 세계관의 특징 중 하나는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물질이 살아있다는 물활론(物活論)이나 물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을 믿습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나무도 산도 강도 바다도 모두 살아있고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흔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남아있지요. 제주도에 가면 ‘남근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반세기 전만 해도 신혼부부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신부가 그 바위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알려져있지요.
죽음의 서사
생명의 서사
산도 바위도 강도 정신을 지닌 주체라고 보는 신화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의 문화’가 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나 (죽음에 관련된) 의례들이 이를 잘 보여주지요. 신화적 세계관을 지닌 옛 문화에는 과거 인류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죽음의 서사’들이 있습니다. 그 다양한 서사들의 공통점은 죽은 자의 삶이 사후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또 다른 삶이 전개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은, 그들이 죽음을 당혹스러운 사태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당혹스러운 문제에 설명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서사’는 그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화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태입니다. 산도 바위도 물도 만물이 살아있다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죽은 자가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생명의 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돌도 살아있는데 숨 쉬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사람의 삶이 끝나겠습니까. 그들에게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죽음의 서사는 죽음이라는 낯선 현상을 친숙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하나의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생명’입니다. 만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있으니까요. 그래서 죽음의 서사는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하데스(그리스 신화에서 죽음과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 저승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참된 관점은 과학적 관점이라고 믿는 오늘날 우리에게 죽음의 서사는 설명력이 없습니다. 죽음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연 세계는 본래 죽어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원자나 소립자를 살아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죽어있는 무기물의 세계가 자연의 본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유기체가, 생명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한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설명이 필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는 ‘생명 과학’이 있습니다. 도대체 저 죽어있는 무기물로부터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것이 우리의 물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서사’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세계관
죽음의 세계관
신화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 문명 이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설명’되어야 하는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죽음의 서사와 함께 죽음의 문화가 생겨납니다. 죽음을 그들에게 친숙한 무엇, 즉 생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죽음의 서사’입니다. 죽음의 서사는 신화적 세계관이 생명의 세계관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만물을 생명의 관점에서 봅니다.
반면에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죽음은,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설명해야 할 것은 죽어있는 물질들에서 어떻게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은 물질세계의 법칙을, 엔트로피의 법칙을 이겨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우주에 널려있는 무기물의 세계,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근대과학적 세계관의 바탕은 죽음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생명 과학은 죽어있는 물질들로 생명을 설명하려는 노력입니다. 과학은 생명의 관점을 버리고 죽음의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야?’
라고 묻는 여러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 신화적 세계관을 되살려 생명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자고요?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죽음의 서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인류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통념이나 상식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하는 과학이 인류 역사의 매우 특수한 시기에 형성된 관점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임은 분명합니다. 과학은 근대의 매우 특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성립된 학문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화와 과학이 갖는 관점의 차이를, 생명의 세계관과 죽음의 세계관의 차이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각 지자체에서 가을철 불청객 은행나무 열매를 조기에 채취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도심의 가로수 길 위에서 바쁜 걸음을 옮기다 급격히 발걸음이 느려지며 ‘아, 가을이 왔구나’ 싶게 만드는 은행에서, 빨갛게 물들어 춤추듯 떨어지는 단풍잎에서, 은빛 향연을 펼치는 억새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경험하시나요?
편상범 교수가 설명한 ‘죽음의 서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에서도 펼쳐집니다. 아일랜드 민요로 알려진 <Danny Boy 아, 목동아(1913)>. 언제나 들어도 따뜻하고 순수하며 향수를 자극하는 이 곡은 선율의 그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노랫말에서 죽음의 이후의 세계관을 덤덤하게 펼쳐 보입니다. 가사의 일부입니다.
박성연 [Danny Boy] (2020)
음악은 대한민국 재즈 보컬리스트의 대모인 박성연 선생의 2020년 발매된 <With Strings>에 수록된 버전으로 감상을 추천해 드립니다. 어느 멋진 날의 연속인 시월 만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