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문을 열어 공기의 냄새와 온도를 느끼기보다 우리는 먼저 휴대폰을 켭니다. 오늘의 날씨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앱으로 확인하고, 친구의 안부는 목소리보다 피드와 스토리가 먼저 전합니다. 화면은 세상을 빠르게 데려오지만, 그 속도에 익숙해질수록 하루는 이상하게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분명 시간은 많이 흘렀고, 여러 일을 한 것 같은데도 가슴속에는 어떤 장면도 뚜렷이 남아 있지 않은 날이 많습니다. 무엇을 봤는지는 기억나지만, 정작 무엇을 ‘겪었는지’는 희미해지는 그런 하루들 말입니다.
『경험의 멸종』에서 저자가 지적하듯, 정보는 넘쳐나지만 우리는 점점 ‘몸으로 통과해 느끼는 순간’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각의 자리엔 데이터가, 체험의 자리엔 기록이 대신 앉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기보다, 살아가는 모습을 스크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변화는 특히 지금의 아이들에게 더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화면 속 세계에 먼저 적응한 아이들에게 놀이터보다 유튜브가, 대화보다 메신저가, 감정보다 반응이 더 익숙합니다. 그들의 하루는 현실보다 가상에서 더 분주하고, 표정보다 이모티콘이 더 정확한 언어가 됩니다. 그 사이 ‘살아 있음’의 감각은 점점 얇아지고,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진짜 따뜻한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크리스틴 로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술은 인간의 편의를 넓혔지만, 감각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감각의 축소는 결국 세대 간의 거리로도 이어집니다. 어른 세대는 흙을 밟으며 놀던 기억이 있고, 바람의 냄새로 계절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계절은 이제 날씨 위젯의 색깔로만 다가옵니다. “가서 느껴봐라.”는 말이 “검색해볼게요.”로 바뀌었을 때, 부딪히며 배우던 세대와 스크롤로 배우는 세대는 더 이상 같은 ‘감각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는 세대 간 단절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이 단절을 떠올리게 한 순간이 있습니다. 어느 해 질 녘, 산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같은 하늘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은 사진으로도 충분히 멋질 것이었지만, 저는 문득 휴대폰을 내려놓았습니다. 카메라 너머로는 절대 담기지 않는 감동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오래 담아두려했습니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갑고, 붉은 석양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노래하는 듯 했고, 산의 숨결은 풀냄새와 함께 잔잔히 올라왔습니다. 그때 남은 것은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선명히 새겨진 감정이었습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저는 마치 명상하듯 잠시 멈춰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금’을 온전히 느끼는 시간. 바람의 온도, 하늘의 색, 산의 숨결이 겹겹이 다가오며 마음속 소음이 잦아들고, 생각이 맑아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명상은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다시 느끼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잃어가던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순간 속의 ‘내 마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무엇을 볼지,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사랑할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힘은 멈춤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멈춤을 통해 생각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물론 화면은 필요하고 기록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나로 사는 시간’을 조금씩 끼워 넣는 일, 그것이 『경험의 멸종』이 건네는 조용한 권유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먼저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켜 보고, 낮에는 하나의 일에 차분히 머물고, 저녁에는 내 마음이 고른 문장을 조용히 한 줄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AI의 알고리즘이 짜 준 하루가 아니라, 내 감정과 내 생각이 만든 하루를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긴 작은 틈에서 우리는 숨을 고르고, 생각을 돌보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붙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작은 회복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가장 확실한 힘이 될지 모릅니다.
‘보는 삶’을 지나 ‘겪는 삶’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화면 속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 자신이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오늘 하루가 단지 보고 기록하는 하루가 아니라, 조용히 느끼고 머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 지금은 단풍이 가장 고운 계절입니다. 카메라보다 한 걸음 먼저 눈을 들어 보세요. 푸른 하늘, 바람이 색을 흔드는 소리, 햇빛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결, 발끝에 사각거리는 낙엽 밟는 느낌,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오늘을 조용히 채워 줄 것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가을을 ‘보는’ 대신 가을을 ‘겪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
아침에 문을 열어 공기의 냄새와 온도를 느끼기보다 우리는 먼저 휴대폰을 켭니다. 오늘의 날씨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신 앱으로 확인하고, 친구의 안부는 목소리보다 피드와 스토리가 먼저 전합니다. 화면은 세상을 빠르게 데려오지만, 그 속도에 익숙해질수록 하루는 이상하게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분명 시간은 많이 흘렀고, 여러 일을 한 것 같은데도 가슴속에는 어떤 장면도 뚜렷이 남아 있지 않은 날이 많습니다. 무엇을 봤는지는 기억나지만, 정작 무엇을 ‘겪었는지’는 희미해지는 그런 하루들 말입니다.
『경험의 멸종』에서 저자가 지적하듯, 정보는 넘쳐나지만 우리는 점점 ‘몸으로 통과해 느끼는 순간’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각의 자리엔 데이터가, 체험의 자리엔 기록이 대신 앉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기보다, 살아가는 모습을 스크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변화는 특히 지금의 아이들에게 더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화면 속 세계에 먼저 적응한 아이들에게 놀이터보다 유튜브가, 대화보다 메신저가, 감정보다 반응이 더 익숙합니다. 그들의 하루는 현실보다 가상에서 더 분주하고, 표정보다 이모티콘이 더 정확한 언어가 됩니다. 그 사이 ‘살아 있음’의 감각은 점점 얇아지고,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진짜 따뜻한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크리스틴 로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술은 인간의 편의를 넓혔지만, 감각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감각의 축소는 결국 세대 간의 거리로도 이어집니다. 어른 세대는 흙을 밟으며 놀던 기억이 있고, 바람의 냄새로 계절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계절은 이제 날씨 위젯의 색깔로만 다가옵니다. “가서 느껴봐라.”는 말이 “검색해볼게요.”로 바뀌었을 때, 부딪히며 배우던 세대와 스크롤로 배우는 세대는 더 이상 같은 ‘감각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는 세대 간 단절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이 단절을 떠올리게 한 순간이 있습니다. 어느 해 질 녘, 산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같은 하늘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은 사진으로도 충분히 멋질 것이었지만, 저는 문득 휴대폰을 내려놓았습니다. 카메라 너머로는 절대 담기지 않는 감동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저 눈으로, 마음으로 오래 담아두려했습니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갑고, 붉은 석양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노래하는 듯 했고, 산의 숨결은 풀냄새와 함께 잔잔히 올라왔습니다. 그때 남은 것은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선명히 새겨진 감정이었습니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저는 마치 명상하듯 잠시 멈춰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금’을 온전히 느끼는 시간. 바람의 온도, 하늘의 색, 산의 숨결이 겹겹이 다가오며 마음속 소음이 잦아들고, 생각이 맑아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명상은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다시 느끼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잃어가던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순간 속의 ‘내 마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무엇을 볼지,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사랑할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힘은 멈춤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멈춤을 통해 생각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물론 화면은 필요하고 기록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나로 사는 시간’을 조금씩 끼워 넣는 일, 그것이 『경험의 멸종』이 건네는 조용한 권유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먼저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켜 보고, 낮에는 하나의 일에 차분히 머물고, 저녁에는 내 마음이 고른 문장을 조용히 한 줄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AI의 알고리즘이 짜 준 하루가 아니라, 내 감정과 내 생각이 만든 하루를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긴 작은 틈에서 우리는 숨을 고르고, 생각을 돌보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붙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작은 회복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가장 확실한 힘이 될지 모릅니다.
‘보는 삶’을 지나 ‘겪는 삶’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화면 속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 자신이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오늘 하루가 단지 보고 기록하는 하루가 아니라, 조용히 느끼고 머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 지금은 단풍이 가장 고운 계절입니다.
카메라보다 한 걸음 먼저 눈을 들어 보세요.
푸른 하늘, 바람이 색을 흔드는 소리, 햇빛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결, 발끝에 사각거리는 낙엽 밟는 느낌,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오늘을 조용히 채워 줄 것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가을을 ‘보는’ 대신 가을을 ‘겪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혼란에 저항하라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양면적이다. 역사학자 루이스멈퍼드가 그의 저서 『기술과 문명』에서 언급했듯이 "기술은 해방의 도구이자 억압의 도구이다." 건전치 못한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술로 가능해진 매끄러운 삶에 다시 마찰을 도입해야 한다. 더 많은 대면 상호작용에 참여하고, 공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을 더 주의 깊게 살피고 배려하며, 스마트폰 사용을 최소화할 것을 권장하는 공적 공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더 잘 파악하고 온라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의 기회비용을 고민해야 한다. (p.325)
삶의 통일성
이따금 사람들은 동물에게 없는 감정이나 동기를 부여하면서 동물을 사람처럼 대하기도 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것을 의인화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용어의 일반적 용법에서는 사실관계에 착오가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동물에게는 다른 감정이 확실히 있고 또 우리는 종종 그런 감정을 명사로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다정한 개 주인은 자기 개의 감정을 애정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탐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의견 차이는 인간 맥락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회사 사장은 부사장이 그에게 헌식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부사장의 행위를 다르게 이해하는 식이다. (p.566)
기계가 된 마음의 영토
우리는 앞으로 탐험하게 될 사상적 지형의 대략적인 지도를 만나게 된다. 이 지형은 '기계가 된 마음의 영토'다. 철학사에서 동물과 인간의 신체가 기계로 선언된 사건은 17세기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마음이 기계로 선언되는 일은 20세기에 와서 일어났다. 이 사상의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개척한 선구자는 사이버네틱스였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가 이룬 풍부한 성과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인지과학이 또 하나의 영토를 이룬다. 나머지 영토는 프랑스 인간과학에서 번성한 반인본주의가 차지한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 마음을 기계로 선언했을까? (p.3, 안내의 글)
달고 미지근한 슬픔
‘몰두’는 허무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규칙이다. 단하는 몰두하지 않는 사람이 싫었다. 이 세계가 거대한 양자 컴퓨터 속 큐비트서버로 구현된 시뮬레이션이고 더는 진짜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거대한 공허만을 안겨준다. 이 세계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이 진실을 아는 것처럼 다른 모든 이들을 비웃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을 끊임없이 다시 말하고 싶어 했다. 어차피 우리는 실재하는 물리적 몸이 없는, 그래서 통 속의 뇌조차 되지 못하는 부유하는 데이터에 불과해. 그리고 그 속삭임이 과거의 인류를 집단 자살로 몰고 갔다. (p.30)
*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5.12.31까지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