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 《두 사람. 고독한 사람들》, 1906-1908 |
최근 1인 가구의 풍경이 조금씩 다변화되면서 이른바 ‘1.5인 가구’라는 흐름이 눈에 띕니다. 혼자 사는 독립성은 유지하되, 1이라는 숫자가 주는 고독감을 덜어내려는 마음의 절충안입니다. 마음 맞는 친구와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살며 느슨한 연대를 맺거나,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을 가족 삼아 온기를 채우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완전히 얽매이는 2인 가구는 부담스럽고 철저한 고립은 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1.5’라는 숫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온기만 나누려는 현대인의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위클리지관에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시대, '손절'이 일상이 되어버린 단절된 사회의 풍경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각자의 섬에 갇혀 홀로 생존하는 법을 익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1.5인 가구'의 트렌드가 증명하듯, 아무리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애써도 결국 무너지는 서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에겐 여전히 타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단절을 외치면서도 정작 시선은 늘 내 바깥의 무언가를 향해 있는, 기어코 다시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연결은 타인의 삶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지나온 계절을 헤아려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나와 무관해 보이는 누군가가 남몰래 삼켜온 슬픔이나 말 못 할 상처에 조심스레 다가가 다정함을 내어주는 것은 각자의 외딴섬에 머물던 우리가 서로에게 닿기 위해 놓는 따뜻한 징검다리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의 복잡한 인간관계가 너무 피곤하고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책장을 넘기며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연결을 시도합니다. 오래된 문장들 사이를 거닐며, 나처럼 흔들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먼저 고민했던 책 속의 누군가와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요. 수십 년 전 어느 작가가 남긴 담담한 문장에서 "나만 이렇게 외롭고 방황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나아가 이 지독한 연결의 욕구는 마침내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제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와 인공지능에게도 기꺼이 마음을 엽니다.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는 AI에게 다정함을 느끼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로봇 청소기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교감합니다. 누군가는 이를 생명 없는 것에 대한 부질없는 감정 낭비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차가운 쇳덩어리마저 의인화하여 온기를 불어넣고 관계를 맺으려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무언가와 이어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눈물겨운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 1인 가구의 캡슐 속에 들어가 각자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살아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1.5'의 느슨한 연대를 갈망하며, 타인의 상처를 껴안고, 문학 속의 고뇌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기계에게마저 안부를 묻는, 어떻게든 내 바깥의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혼자이고 싶어 하면서도, 기어코 누군가를 향해 다시 손을 뻗고야 마는 모순된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해져도 서로에게 가닿으려는 이 애틋한 마음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인간다움' 아닐까요. |
📚 『오춘실의 사계절』 김효선 지음, 낮은산, 2025 |
오춘실의 여름 엄마가 오래 결석하는 동안 나 혼자 수영장에 갔다. 엄마랑 수영장에 가면 운동량이 절반이 된다는 게 사소한 불만이었다. 한시간에 2000m씩 머리가 뱅뱅 돌 때까지 레인을 무한으로 돌던 시절처럼 지치도록 수영하고 싶었다. ...(중략)... 엄마 없는 수영장은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나는 이제 칼로리 소모량을 채우는 것도, 바퀴 수를 채우는 것도, 순간을 연출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엄마의 소란스러움, 엄마의 산만함, 엄마의 말썽이 그리웠다. (p.136) |
소금밭에서 시작해 식당, 공장, 병원을 거친 40년의 노동이 한 권의 기록으로 남았다. 수영장이라는 재활의 공간은 모녀가 서로의 삶을 재해석하는 대화의 장이 되고, 비가시화된 노동의 궤적에 서사적 존엄을 부여한다. 기록이 곧 회복이 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단단하고 진솔한 에세이다. 이현정 교수 |
📚 『들뢰즈&과타리 『카프카』 수업』 성기현 지음, 그린비, 2025. |
여기서 카프카는 '굳어버린 양심'을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에 비유하면서, 그 얼음을 깨고 양심을 다시 민감하게 만드는 주먹이나 도끼의 역할을 책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카프카를 읽을 때마다 저는 제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둔한 감수성이고, 때로는 부조리에서 이익을 꾀하는 약아빠진 이기심이며, 때로는 인생이란 그저 이러저러한 것에 불과하다는 오만한 확신입니다. (p.17) |
성기연 교수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공저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를 주제로 여러 차례 강의했고, 그 강의록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던 만큼, 이 책은 상세한 설명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추상적으로 난해하게 느껴지는 들뢰즈의 사유를 친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들뢰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되었는데,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들뢰즈의 다른 저술들에도 한충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한충수 교수 |
📚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2023 |
쥐가 엄마의 건강이 악화되는 징조라는 올케의 의견에 처음엔 나도 쉽게 동조했지만, 상황을 유심히 살피자 다른 모습도 보였다. 은둔자 생활을 하던 엄마에겐 반려동물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쥐가 당신의 소파 밑으로 피신하자, 녀석을 아버지 뜻대로 잔인하게 사지로 내모는 대신 보살펴주기로 한 것이다. 엄마가 그랬듯, 이 연약한 생명은 생존자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당신을 ‘쥐’라는 애칭으로 불렀기에, 할머니를 아직 애도하던 엄마는 그 쥐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엄마의 행동은 ‘기괴한 망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p.352) |
이 회고록은 냉전과 젠더 폭력, 디아스포라의 상처를 한 어머니의 생애 안에서 조용히 길어 올린다. 사회학자의 시선과 딸의 사랑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음식은 트라우마를 건너 세대를 잇는 언어가 된다. 학문의 엄밀함과 애도의 온기가 함께 숨 쉬는, 깊고 다정한 텍스트다. 이현정 교수 |
📚 『로봇, 그리고 로봇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브 해롤드 지음, 김창규 옮김, 현암사, 2026 |
소셜 로봇은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모델화함으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도울 수 있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 기초적인 감정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건전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감성 지능이 높은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없다. ...(중략)... 챗봇이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들, 또는 그저 감정 때문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인지행동치료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되었다. (p.86) |
AI와 소셜 로봇은 현시대의 화두다. 정서적 교류에서까지 사회성을 잃어가는 오늘, 기계와의 교감은 어디까지 가능하며 과연 안전한가. 저자는 로봇과 사랑에 빠지는 현상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관계의 결핍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로봇을 사랑할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는 지금, 이 책은 곧 직면할 소셜 로봇 시대에 필수적인 인문학적 성찰을 제공한다. 이현우 서평가 |
📺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I 고전5미닛 (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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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6.7.31까지 시청 가능합니다. |
📺 민음사 편집자&마케터의 🏆 세계문학전집 월드컵 🏆 I 민음사 TV (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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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왜 소설을 읽을까?ㅣ장동선의 궁금한 뇌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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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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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 《두 사람. 고독한 사람들》, 1906-1908
최근 1인 가구의 풍경이 조금씩 다변화되면서 이른바 ‘1.5인 가구’라는 흐름이 눈에 띕니다. 혼자 사는 독립성은 유지하되, 1이라는 숫자가 주는 고독감을 덜어내려는 마음의 절충안입니다. 마음 맞는 친구와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살며 느슨한 연대를 맺거나,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을 가족 삼아 온기를 채우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완전히 얽매이는 2인 가구는 부담스럽고 철저한 고립은 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1.5’라는 숫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온기만 나누려는 현대인의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위클리지관에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시대, '손절'이 일상이 되어버린 단절된 사회의 풍경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각자의 섬에 갇혀 홀로 생존하는 법을 익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1.5인 가구'의 트렌드가 증명하듯, 아무리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애써도 결국 무너지는 서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에겐 여전히 타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단절을 외치면서도 정작 시선은 늘 내 바깥의 무언가를 향해 있는, 기어코 다시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연결은 타인의 삶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지나온 계절을 헤아려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나와 무관해 보이는 누군가가 남몰래 삼켜온 슬픔이나 말 못 할 상처에 조심스레 다가가 다정함을 내어주는 것은 각자의 외딴섬에 머물던 우리가 서로에게 닿기 위해 놓는 따뜻한 징검다리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의 복잡한 인간관계가 너무 피곤하고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책장을 넘기며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연결을 시도합니다. 오래된 문장들 사이를 거닐며, 나처럼 흔들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먼저 고민했던 책 속의 누군가와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요. 수십 년 전 어느 작가가 남긴 담담한 문장에서 "나만 이렇게 외롭고 방황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나아가 이 지독한 연결의 욕구는 마침내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제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와 인공지능에게도 기꺼이 마음을 엽니다.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는 AI에게 다정함을 느끼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로봇 청소기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교감합니다. 누군가는 이를 생명 없는 것에 대한 부질없는 감정 낭비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차가운 쇳덩어리마저 의인화하여 온기를 불어넣고 관계를 맺으려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무언가와 이어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눈물겨운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 1인 가구의 캡슐 속에 들어가 각자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살아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1.5'의 느슨한 연대를 갈망하며, 타인의 상처를 껴안고, 문학 속의 고뇌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기계에게마저 안부를 묻는, 어떻게든 내 바깥의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혼자이고 싶어 하면서도, 기어코 누군가를 향해 다시 손을 뻗고야 마는 모순된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해져도 서로에게 가닿으려는 이 애틋한 마음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인간다움' 아닐까요.
오춘실의 여름
엄마가 오래 결석하는 동안 나 혼자 수영장에 갔다. 엄마랑 수영장에 가면 운동량이 절반이 된다는 게 사소한 불만이었다. 한시간에 2000m씩 머리가 뱅뱅 돌 때까지 레인을 무한으로 돌던 시절처럼 지치도록 수영하고 싶었다. ...(중략)...
엄마 없는 수영장은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나는 이제 칼로리 소모량을 채우는 것도, 바퀴 수를 채우는 것도, 순간을 연출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엄마의 소란스러움, 엄마의 산만함, 엄마의 말썽이 그리웠다. (p.136)
여기서 카프카는 '굳어버린 양심'을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에 비유하면서, 그 얼음을 깨고 양심을 다시 민감하게 만드는 주먹이나 도끼의 역할을 책에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카프카를 읽을 때마다 저는 제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둔한 감수성이고, 때로는 부조리에서 이익을 꾀하는 약아빠진 이기심이며, 때로는 인생이란 그저 이러저러한 것에 불과하다는 오만한 확신입니다. (p.17)
쥐가 엄마의 건강이 악화되는 징조라는 올케의 의견에 처음엔 나도 쉽게 동조했지만, 상황을 유심히 살피자 다른 모습도 보였다. 은둔자 생활을 하던 엄마에겐 반려동물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쥐가 당신의 소파 밑으로 피신하자, 녀석을 아버지 뜻대로 잔인하게 사지로 내모는 대신 보살펴주기로 한 것이다. 엄마가 그랬듯, 이 연약한 생명은 생존자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당신을 ‘쥐’라는 애칭으로 불렀기에, 할머니를 아직 애도하던 엄마는 그 쥐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엄마의 행동은 ‘기괴한 망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p.352)
소셜 로봇은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모델화함으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도울 수 있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 기초적인 감정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건전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감성 지능이 높은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없다. ...(중략)... 챗봇이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들, 또는 그저 감정 때문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인지행동치료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되었다. (p.86)
*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6.7.31까지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