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살펴보는 예술인문학자 이동섭 작가의 세 번째 칼럼입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입니다. |
잠든 집시여자 La Bohémienne endormie 1897년 뉴욕 모마소장 |
앙리 루소, 가난한 독학자가 행복했던 비결은? 새해의 다짐이 잊힐 무렵이면, 반면교사가 될 만한 사람의 이야기에 끌린다. 특히 온갖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꿋꿋이 밀고 나간 열정적인 인물들. ‘공무원화가’로 숱한 오해와 멸시를 견디면서 독창적인 작품으로 미술사에서 이름을 새긴 ‘세관원 앙리 루소 Le douanier Henri Rousseau’처럼 말이다. 가난한 아마추어로 무시당하다 앙리 루소는 27세가 되던 1871년에 파리 세관의 하급 관리로 취직해서 1893년에 그만뒀다. 22년을 세관공무원으로 살았고, 49세에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퇴직했다. ‘세관원 루소’는 가난한 독학자였기에 비싼 취미생활이라는 비아냥과 몰이해를 견뎌야 했다. 모든 단점은 장점을 품고 있다는 말처럼, 이런 처지가 그림을 독특하게 만들었다. 혼자 보고, 혼자 평가하고, 혼자 그리다 보니 열심히 그려도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캔버스에 묘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정하지 못한 미숙함의 완성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굉장히 독특한 그림이 되었다. 그런 투박한 그림을 1885년에 세상에 내보였으나, 루소의 가치를 알아채는 심사위원은 없었다. 당시 그들에게 좋은 그림은 루소의 그림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류 회화에서 소재를 취한 <전쟁의 여신>이 그 증거다.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다 |
전쟁의 여신 la guerre, 캔버스에 유채, 114 × 195 cm, 1894년경, 오르세 |
흰옷을 입은 여자가 횃불과 칼을 들고 검은 말을 타고 있다. 그 아래에 벌거벗은 시체들이 가득하고, 까마귀들이 날아와 시체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다. 불에 탄 듯한 검은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회색 나무는 가지가 툭 부러져있다. 하늘은 푸르지만 구름은 울긋불긋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전쟁의 여신 벨론은 흰옷을 입혀 말과 분리되어 보이고, 말을 타고 있으니 당연히 여신의 왼발은 말 뒤편으로 가 있어서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루소는 그 발도 정면에서 보이게 그려서 여신의 몸과 다리는 비뚤어져서 떨어질 것만 같다. 화면 전체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들과 비율의 왜곡, 원근법의 파괴, 사람이 아니라 종이 인형을 잘못 그린 것 같은 인체 묘사, 시체의 피부를 매끄럽게 처리해서 부피감은 있으나 무게감이 없으며, 관람객을 또렷이 지켜보는 전면의 콧수염 남자는 허망한 웃음마저 나게 만든다. 마치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시골 어린이가 그린 듯 조악하다. 하지만 루소의 잘못 그려진 그림의 잔상은 강력하다. 전쟁의 참사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많은 작품들을 볼 때는 ‘우와, 생생해서 진짜 현실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곧장 다른 그림을 보다 보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그림은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전쟁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영웅과 승리자는 일절 없고, 파괴와 죽음으로 뒤덮인 내용과 그것을 루소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표현법이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소의 미숙함이 독창성으로 이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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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Le Rêve, 캔버스에 유채, 204,5x299cm, 1910년, MoMA |
피카소의 열광을 받다 세상의 야박한 평가에도 루소는 꿋꿋이 그렸고, 어느 날 행운이 날아왔다. 우연히 루소의 여인 초상화를 구매한 피카소는 거기에 담긴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적인 힘을 보았고, 자신의 화실에서 루소를 초대하여 ‘루소의 밤’을 연 것이다. 그날 밤 피카소가 루소에게 찬사를 바치자, 루소가 했다는 대답이 전설적이다. “우리 둘 다 이 시대의 위대한 화가입니다. 다만 선생은 이집트 양식에서, 나는 현대적 양식에서.” 자신감의 근거는 당시 집중해 있던 밀림 시리즈였다. 그는 6년여 동안 26점의 밀림을 소재로 환상적인 풍경을 완성했고, 동시대의 앞선 화가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그림을 완성하다 |
땅꾼 la charmeuse de serpents, 캔버스에 유채, 1907년, 169x189cm, 오르세 |
가난한 루소는 열대의 밀림은커녕 파리 근교도 벗어나지도 못했다. 파리 식물원, 파리 자연사박물관, 백화점의 홍보 책자에서 찾은 식물과 동물들을 결합시키고 상상을 덧씌워서 ‘루소의 밀림’을 발명해 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밀림 속에는 원숭이나 코끼리 외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여러 동물도 등장하고, 식물들의 모양도 실제와 다르다. 특히 <땅꾼>은 아주 기묘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루소가 친구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그렸는데, 인도 여행을 다녀온 그녀에게 여행담을 듣고 뱀을 부리는 여자의 이야기를 구성했다. 부르주아 사회가 안착되어 가던 당시에 이국에 대한 열광은 뜨거웠고, 루소의 밀림은 도시인의 감각적 쾌감에 부합했다. 파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그렸던 밀림은 상상과 환상으로 비현실이었고,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당대의 프랑스인과 지금의 우리에게도 가 닿을 수 없는 달콤함을 전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하다 |
나, 초상 : 풍경 Moi-même, portrait : paysage, 캔버스에 유채, 143x110,5cm, 1890년, 프라하 국립 갤러리 소장 Narodni Galerie, Praha |
루소는 삶을 그림에 바쳤다. 생애 내내 이어진 불행과 불운의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던 루소는 행복했다. 모든 물질이 주어졌으나 어떤 욕구도 없이 매일을 무료하게 보내야 했던 로코코 시대의 귀족들은 루소를 부러워할 것이다. 한가한 시간은 좀체 없고 항상 쫓기듯 바쁘고, 매일을 견뎌내는 기분인 지금의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청춘은 나이로 규정되지 않고, 스스로 불꽃을 피울 수 있느냐는 심리 상태로 판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열정의 청춘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음을, 그것은 우리 하기 나름이라고, 다시 스스로 뜨거울 수 있냐고 루소는 2024년을 갓 시작한 우리에게 묻고 있다. |
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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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살펴보는 예술인문학자 이동섭 작가의 세 번째 칼럼입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입니다.
앙리 루소, 가난한 독학자가 행복했던 비결은?
새해의 다짐이 잊힐 무렵이면, 반면교사가 될 만한 사람의 이야기에 끌린다. 특히 온갖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꿋꿋이 밀고 나간 열정적인 인물들. ‘공무원화가’로 숱한 오해와 멸시를 견디면서 독창적인 작품으로 미술사에서 이름을 새긴 ‘세관원 앙리 루소 Le douanier Henri Rousseau’처럼 말이다.
가난한 아마추어로 무시당하다
앙리 루소는 27세가 되던 1871년에 파리 세관의 하급 관리로 취직해서 1893년에 그만뒀다. 22년을 세관공무원으로 살았고, 49세에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퇴직했다. ‘세관원 루소’는 가난한 독학자였기에 비싼 취미생활이라는 비아냥과 몰이해를 견뎌야 했다. 모든 단점은 장점을 품고 있다는 말처럼, 이런 처지가 그림을 독특하게 만들었다. 혼자 보고, 혼자 평가하고, 혼자 그리다 보니 열심히 그려도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캔버스에 묘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정하지 못한 미숙함의 완성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굉장히 독특한 그림이 되었다. 그런 투박한 그림을 1885년에 세상에 내보였으나, 루소의 가치를 알아채는 심사위원은 없었다. 당시 그들에게 좋은 그림은 루소의 그림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류 회화에서 소재를 취한 <전쟁의 여신>이 그 증거다.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다
전쟁의 여신 la guerre, 캔버스에 유채, 114 × 195 cm,
1894년경, 오르세
흰옷을 입은 여자가 횃불과 칼을 들고 검은 말을 타고 있다. 그 아래에 벌거벗은 시체들이 가득하고, 까마귀들이 날아와 시체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다. 불에 탄 듯한 검은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회색 나무는 가지가 툭 부러져있다. 하늘은 푸르지만 구름은 울긋불긋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전쟁의 여신 벨론은 흰옷을 입혀 말과 분리되어 보이고, 말을 타고 있으니 당연히 여신의 왼발은 말 뒤편으로 가 있어서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루소는 그 발도 정면에서 보이게 그려서 여신의 몸과 다리는 비뚤어져서 떨어질 것만 같다. 화면 전체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들과 비율의 왜곡, 원근법의 파괴, 사람이 아니라 종이 인형을 잘못 그린 것 같은 인체 묘사, 시체의 피부를 매끄럽게 처리해서 부피감은 있으나 무게감이 없으며, 관람객을 또렷이 지켜보는 전면의 콧수염 남자는 허망한 웃음마저 나게 만든다. 마치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시골 어린이가 그린 듯 조악하다. 하지만 루소의 잘못 그려진 그림의 잔상은 강력하다. 전쟁의 참사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많은 작품들을 볼 때는 ‘우와, 생생해서 진짜 현실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곧장 다른 그림을 보다 보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그림은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전쟁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영웅과 승리자는 일절 없고, 파괴와 죽음으로 뒤덮인 내용과 그것을 루소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표현법이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소의 미숙함이 독창성으로 이끈 셈이다.
꿈 Le Rêve, 캔버스에 유채, 204,5x299cm, 1910년, MoMA
피카소의 열광을 받다
세상의 야박한 평가에도 루소는 꿋꿋이 그렸고, 어느 날 행운이 날아왔다. 우연히 루소의 여인 초상화를 구매한 피카소는 거기에 담긴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적인 힘을 보았고, 자신의 화실에서 루소를 초대하여 ‘루소의 밤’을 연 것이다. 그날 밤 피카소가 루소에게 찬사를 바치자, 루소가 했다는 대답이 전설적이다. “우리 둘 다 이 시대의 위대한 화가입니다. 다만 선생은 이집트 양식에서, 나는 현대적 양식에서.” 자신감의 근거는 당시 집중해 있던 밀림 시리즈였다. 그는 6년여 동안 26점의 밀림을 소재로 환상적인 풍경을 완성했고, 동시대의 앞선 화가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그림을 완성하다
땅꾼 la charmeuse de serpents, 캔버스에 유채, 1907년, 169x189cm, 오르세
가난한 루소는 열대의 밀림은커녕 파리 근교도 벗어나지도 못했다. 파리 식물원, 파리 자연사박물관, 백화점의 홍보 책자에서 찾은 식물과 동물들을 결합시키고 상상을 덧씌워서 ‘루소의 밀림’을 발명해 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밀림 속에는 원숭이나 코끼리 외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여러 동물도 등장하고, 식물들의 모양도 실제와 다르다. 특히 <땅꾼>은 아주 기묘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루소가 친구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그렸는데, 인도 여행을 다녀온 그녀에게 여행담을 듣고 뱀을 부리는 여자의 이야기를 구성했다.
부르주아 사회가 안착되어 가던 당시에 이국에 대한 열광은 뜨거웠고, 루소의 밀림은 도시인의 감각적 쾌감에 부합했다. 파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그렸던 밀림은 상상과 환상으로 비현실이었고,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당대의 프랑스인과 지금의 우리에게도 가 닿을 수 없는 달콤함을 전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하다
루소는 삶을 그림에 바쳤다. 생애 내내 이어진 불행과 불운의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던 루소는 행복했다. 모든 물질이 주어졌으나 어떤 욕구도 없이 매일을 무료하게 보내야 했던 로코코 시대의 귀족들은 루소를 부러워할 것이다. 한가한 시간은 좀체 없고 항상 쫓기듯 바쁘고, 매일을 견뎌내는 기분인 지금의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청춘은 나이로 규정되지 않고, 스스로 불꽃을 피울 수 있느냐는 심리 상태로 판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열정의 청춘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음을, 그것은 우리 하기 나름이라고, 다시 스스로 뜨거울 수 있냐고 루소는 2024년을 갓 시작한 우리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