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3] 즐겁고 재밌게, '찰나'의 연속극

이치훈
2024-04-03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봄의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淸明, 4 월4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날이 푸르고 밝아진 청명엔, 이날을 기다렸다 농사 준비에 들어가고, 고기잡이 같은 생업 활동들도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또 특별히 택일을 하지 않고도 이날에 산소를 돌보거나, 묫자리 고치기, 집수리 등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겨우내 미뤄두었던 것을 한다고 합니다. 좋은 날 기다리며 미뤄온 ‘무엇’이 있으신가요? 비로소 청명한 날입니다.


옥스퍼드 대석학, 세계적 생명과학자, ‘시스템 생물학’ 이론을 창안해 노벨상 후보로도 여러 번 거론된 거장의 메세지는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삶을 즐기세요. 삶에서 재미를 만드세요.”

생명과학자 데니스 노블 옥스퍼드대 종신 교수 (신동아©)

생명과학자 데니스 노블(Denis Noble)은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나 23세 때 심장 근육과 박동에 관한 연구 논문이 세계적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리면서 일약 ‘천재’로 주목받습니다. ‘컴퓨터’란 말조차 생소하던 1960년대에 컴퓨터로 ‘가상 심장(virtual heart)’을 구현해, 이를 이용한 신약 부작용 실험으로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 내고, 그의 논문들은 심장의 현대 전기 생리학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인공 장기(臟器)’ 개발과 생명공학과 의학 분야에서 AI를 접목하여 이룬 성과로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로도 수차례 거론된 노블 교수는, ‘생명’을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연구하는 '시스템 생물학'의 선구자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평생을 쏟아온 시스템 생물학과 동양의 사상인 불교 철학과 맞닿아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2022년 서울 봉은사, 양산 통도사, 남원 실상사, 장성 백양사 천진암, 해남 미황사 등 한국 사찰에서 그는 한 달 반 동안을 머물며,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에 참석하고, 참선과 명상 수행을 이어가며 울력 때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청소하며, 법력 높은 고승들을 만나 인생의 지혜를 나누고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품어온 근원적인 질문을 나눕니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연결되는 과학자와 고승의 대담은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 철학을 넘나들며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끌어냅니다. 깨달음을 향한 이 특별한 여정은 노블 교수의 특별한 여정은 다큐멘터리 ‘노블이 묻다(Noble Asks)’와 책 ‘오래된 질문’으로 담겨 나왔습니다.

MBC 다큐멘터리 ‘노블이 묻다(Noble Asks)' (MBC©)

시스템 생물학(Systems biology)이란, 생명체를 여러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하나의 시스템 구조로 규정하고, 생물학뿐만 아니라 전산학,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의 원칙을 사용해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기존의 현대 과학은 생명의 구성 요소를 하나하나 분해하여 개별적인 기능을 알아내는 방식을 통해 발전해 왔으나, 우리 생명체는 단백질, 세포, 장기(臟器) 등 다수의 화합물이 복잡한 반응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유기체입니다. 서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쉼 없이 교류하는 하나의 시스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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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DNA’라는 글자로 만들어진 아주 두껍고 커다란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책 안에 쓰여 있는 ‘글자’ 한 개 한 개가 책이 아닌 것처럼 유전자가 곧 ‘우리(생명)’는 아닌 거죠. 예를 들어, DNA만 끄집어내 배양액에 넣고 영양분을 준다고 생명이 탄생하나요? 절대, 아니죠. DNA는 어떤 형태의 성질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몸이라는 시스템 안에서만 살아 있는 거죠. 유전자라는 건 좋다 나쁘다 하는 이분법적 존재가 아니고, 이기적 존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그렇습니다. 시스템생물학 관점으로 접근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몸을 시스템으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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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융의, 데니스 노블 -‘이기적 유전자’에 맞섰던 생명과학자 “삶은 본인 손에 있다” (포춘코리아©)

스승과 제자로 만나, 지금은 가족처럼 지내는 서울대 의대 엄융의 교수로부터 10여 년 전 소개받은 원효 스님의 책을 통해 불교 철학 사상을 접하고, 노블 교수는 자신이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통적인 동양 사상, 불교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고 회상합니다. 한자까지 독학하면서 영어 번역과 대조할 만큼 원효 스님의 책에 빠져들었던 그는, 불교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무아(無我)’나 ‘연기(緣起)’가 바로 시스템 생물학적 상상력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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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전자 숫자는 대략 3만 개로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면 그 유전자 사이에서는 얼마나 많은 상호작용과 교류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몇 년 전에 제가 직접 계산해 보았는데 무려 2 곱하기 10의 72403제곱이에요. 이 숫자만 다 나열해 적는 데만도 A4용지로 30페이지가량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또 다른 나’라는 건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특별하고 하나하나 삶이 귀중한 겁니다. 모든 건 그 자체로 공허합니다. 다른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이 무언가 유의미한 것으로 태어나지요.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까지 가는 걸 길이로 말하면 대략 30cm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이걸 한 번의 행동으로 느끼지만, 사실 순간순간의 과정이죠. 하지만 대부분 이 ‘찰나’를 놓치고 살아갑니다. 이 찰나의 연속을 명료하게 보게 되면, 이 세상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러니 삶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이러한 이치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삶을 즐기세요. 삶에서 재미를 만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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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신동아 X 플라톤아카데미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 세계적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이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 편에서 발췌한 글들을 각색/편집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4719076/1

<Philip Glass - Opening> (Official Video)

노블 교수가 ‘생명’을 시스템 구조로, ‘삶’을 찰나의 연속으로, ‘세상’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으로 설명한 대목에서 1960년대 서양 클래식 음악계 한켠에서 두드러졌던 미니멀 음악이 떠올랐습니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듣는 이의 적극성을 끌어내는 이 음악 양식은, 두 가지 기본 원칙을 갖습니다. 첫째, 단순화. 둘째, 반복. 쉽게 말해 짧고 단순한 선율이나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느리고 미세하게 변화(발전)시켜 갑니다. 필립 글라스, 스티브 라이히, 아르보 패르트, 헨릭 고레츠키 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미니멀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그 단순함의 반복 속에서 ‘본질’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됩니다. 치열하게 쌓고 다져왔을 기교와 남다른 표현들이 때로는 무색하다 할 만큼, 단순화된 반복 속에서도 필요로 하는 모든 감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니멀 음악의 1세대 대표주자인 필립 글래스의 대표곡을 남깁니다. 미니멀 음악의 대중화에 가장 큰 공을 남기고, 영화음악과 오페라 등을 통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한 필립 글래스의 1981년 작 <Opening>을 감상하시며, 내 삶의 여정을 이루고 있는 단순한 찰나, 그 찰나의 연속을 알아차리는 즐거움을, 재미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대담] 2022 노블교수와 도킨스교수의 세기적 논쟁 현장

“그동안 인류는 눈부신 과학 발전을 이루면서 생명 원리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걸 표현하는 데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렇다고 생각해요. 유전자는 그 자체로 이기적일 수도, 이타적일 수도 없습니다. DNA는 우리를 이기적이게 만들지 않아요. 인간이 그렇게 만드는 거죠. 거듭 말하지만, 유전자라는 건 좋다 나쁘다 하는 이분법적 존재가 아니고 이기적 존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유기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진화적 변화를 주도한다는 ‘이기적 유전자'을 저술한 리처드 도킨스와 데니스 노블의 2022년 논쟁은 생명에 대한 사유를 더욱 즐겁게 하고 재미를 더해줍니다. 시청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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