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살펴보는 예술인문학자 이동섭 작가의 특집 칼럼입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클로드 모네(1840-1926)입니다. |
<수련>에 깃든 비밀은 단단한 일상이다. - 모네 “저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저는 믿고 바란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일상을 단단히 유지하겠다는 말에서 화가 클로드 모네가 떠올랐다. 모네의 인생은 프랑스 혁명부터 1차 대전에 이르는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한다. 왕정복고 시기 동안 모네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리를 떠나 이복누이가 살던 파리 북쪽의 르아브르에 정착했다. 이것이 모네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다. 노르망디의 항구도시인 르아브르에서 어린 모네는 청명한 하늘과 신선한 파도를 보며 자랐고,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캔버스를 위대하게 만드는 밑거름이었다.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모네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스승 외젠 부댕은 모네에게 “사물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에서 오는 힘과 안정감은 화실에서 그리는 그림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다.”며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현장에서 그림을 마무리하라고 충고했다. 함께 바닷가에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던 부댕은 모네를 제자가 아닌 동료로 대했다. 모네의 두 번째 스승은 네덜란드 출신의 용킨드였다. 모네는 그에게서 대기 중에서 빛을 포착하는 법과 예술가의 눈을 갖는 법을 배웠다. |
작품에 확신을 품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20대 초반의 모네는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왔다. 그는 당시 인기를 끌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던 <이삭줍기>와 <만종>의 프랑수아 밀레로 대표되는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를 좋아했으나, 그 길로 가지는 않았다. 르누아르, 시슬레와 바지유같은 또래의 동료 화가들과 새로운 그림인 인상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인상파 그림들은 이전 시대의 그림보다 밝고 화사하다. 그게 뭐 그리 큰 변화인가 싶지만, 결정적인 차이다. 캔버스가 밝아졌다는 뜻, 그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인상주의를 완성하다 인상주의의 핵심은 자연의 빛을 화가의 자유로운 색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가 관찰한 결과 화창한 숲에서는 나무와 잎사귀들로 그림자가 검은색이 아니고, 흰색 원피스도 햇빛의 반사와 산란으로 보라빛이 감돌았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에 보라나 초록 같은 색깔을 흐르게 했다. 그의 팔레트에는 검은색이 없었던 이유다. 겨울에 내린 눈도 자세히 관찰하면 햇빛이 반사되어 약간 보랏빛이 흐른다는 사실도 모네는 알아챘다. 그는 남들처럼 보지 않고, 그려왔던 대로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본 대로 그린 모네의 캔버스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던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지적은 정확하다. |
새로운 미술을 추구한 대가는 가혹한 가난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역사적인 내용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길 즐겼고, 역사화가 최고의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학교)와 ‘살롱’(전시회)을 통해 전파된 그림만이 제대로 된 그림이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과 기법의 그림만을 선택했다. 그에 위반되면 도덕적 침범으로 간주했다. 신흥 중산층, 상공업종사자들은 돈은 있으나 교양이 부족했기에 이전 귀족들의 문화적 취향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모네와 동료들은 가난을 감당하며, 인상주의의 가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인상주의를 당시 프랑스의 중산층들이 선호하게 되면서 모네는 막대한 부와 국제적인 명성을 거머쥐었다. 이런 성공의 대가를 그는 당시 사람들이 깜짝 놀랄 일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지베르니 정원 건립에 돈을 쏟은 이유 그는 그림으로 번 돈을 무성한 풀과 나무, 세계 각지에서 공수한 꽃을 심었고, 굽이치는 둑을 만들고, 구불구불한 길을 내어 물의 정원을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연못과 화단을 색과 높이에 따라 분류하여 대규모 정물화처럼 세심하게 꾸몄다. 이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연못에 필요한 수로를 끌어오기 위해 자신들의 농사를 망치려고 파리에서 온 화가가 일부러 물을 많이 사용한다고 믿은 주변 농부들과 여러 번 충돌했고, 관청에 허가를 요구하는 각종 편지들도 써야 했었다. 이런 귀찮음과 난관을 감당한 이유는 그림때문이었다. 정원이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라는 모네의 말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모네에게 정원은 그림의 잠재태였고 그림은 정원의 발현체였던 셈이다. 그는 정원을 그리기 위해 정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지베르니 정원을 만들면서 그는 <루앙 대성당> 연작도 하나씩 완성해 내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 오후와 저녁의 빛의 온도가 달라지면서 성당 외관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 바뀐다. 모네는 이것을 스물여섯 점의 각기 다른 색채로 빛나는 루앙대성당으로 완성했다. 여기서 시도하여 얻은 결과를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대표작인 <수련> 연작이 세상에 나왔다. |
‘잠든 연꽃’이라는 뜻의 수련은 그 이름은 평온하지만, 모네의 <수련>은 색채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언뜻 스치는 모순이 모네가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사랑했던 부인들과 큰아들이 차례로 죽었고, 빛과 색에 탐닉한 결과였는지 백내장으로 회복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모네는 수술로 시력을 회복하지 못하리라 믿었고, 미루고 미루다 하게 된 수술은 실패했다. 유명한 의사가 맞춰준 안경도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나 다름없을 때 작곡을 했듯이, 나는 장님에 가까운 상태로 그림을 그린다.”[1] 이런 악조건 속에서 모네는 생애 후반 30여 년 동안 250여 점의 수련을 그렸다. 역시 명작은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어지는 것일까?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다 모네의 생애를 되짚으면, 그는 성공을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모네는 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도전했다. 같은 것을 반복하면 사는 인생은 그에게는 낭비였다. 성공으로 얻은 결과는 새로운 작품을 위해 투자하자, 성취는 다른 성취로 이어졌다. 그림값이 오르고 잘 팔리게 되면 대체로 안주한다. 대중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만 만들면 된다고 믿는 예술가와 언제나 대중보다 새로움에 한 발 정도 앞서 나가야 한다고 믿는 예술가가 있다. 르누아르는 전자, 모네가 후자였다. 자기 그릇에 맞는 성공의 크기가 있다고 믿는 쪽과 설령 그 크기가 정해져 있더라도 노력으로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쪽이 있다. 모네는 후자였다. 따라서 모네의 신작에는 이전 그림을 통한 연구의 결과가 녹아들었고, 그에게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향한 도전의 밑천이었다. 그 과정에서 모네의 그림은 점점 깊어지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모네에게 그림의 깊이는 작은 성공과 성취에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끈기와 성실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창작을 중심에 두고 일상의 삶을 잘 보살폈기에 가능했다.
[1] 데브라 멘코프, 모네가 사랑한 정원, 김잔디옮김, 중앙북스, p.202 |
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
예술가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살펴보는 예술인문학자 이동섭 작가의 특집 칼럼입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클로드 모네(1840-1926)입니다.
<수련>에 깃든 비밀은 단단한 일상이다.
- 모네
“저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저는 믿고 바란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일상을 단단히 유지하겠다는 말에서 화가 클로드 모네가 떠올랐다.
모네의 인생은 프랑스 혁명부터 1차 대전에 이르는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한다. 왕정복고 시기 동안 모네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리를 떠나 이복누이가 살던 파리 북쪽의 르아브르에 정착했다. 이것이 모네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다. 노르망디의 항구도시인 르아브르에서 어린 모네는 청명한 하늘과 신선한 파도를 보며 자랐고,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캔버스를 위대하게 만드는 밑거름이었다.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모네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스승 외젠 부댕은 모네에게 “사물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에서 오는 힘과 안정감은 화실에서 그리는 그림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다.”며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현장에서 그림을 마무리하라고 충고했다. 함께 바닷가에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던 부댕은 모네를 제자가 아닌 동료로 대했다. 모네의 두 번째 스승은 네덜란드 출신의 용킨드였다. 모네는 그에게서 대기 중에서 빛을 포착하는 법과 예술가의 눈을 갖는 법을 배웠다.
작품에 확신을 품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20대 초반의 모네는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왔다. 그는 당시 인기를 끌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던 <이삭줍기>와 <만종>의 프랑수아 밀레로 대표되는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를 좋아했으나, 그 길로 가지는 않았다. 르누아르, 시슬레와 바지유같은 또래의 동료 화가들과 새로운 그림인 인상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인상파 그림들은 이전 시대의 그림보다 밝고 화사하다. 그게 뭐 그리 큰 변화인가 싶지만, 결정적인 차이다. 캔버스가 밝아졌다는 뜻, 그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인상주의를 완성하다
인상주의의 핵심은 자연의 빛을 화가의 자유로운 색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가 관찰한 결과 화창한 숲에서는 나무와 잎사귀들로 그림자가 검은색이 아니고, 흰색 원피스도 햇빛의 반사와 산란으로 보라빛이 감돌았다. 그래서 그는 그림자에 보라나 초록 같은 색깔을 흐르게 했다. 그의 팔레트에는 검은색이 없었던 이유다. 겨울에 내린 눈도 자세히 관찰하면 햇빛이 반사되어 약간 보랏빛이 흐른다는 사실도 모네는 알아챘다. 그는 남들처럼 보지 않고, 그려왔던 대로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본 대로 그린 모네의 캔버스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던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지적은 정확하다.
새로운 미술을 추구한 대가는 가혹한 가난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역사적인 내용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길 즐겼고, 역사화가 최고의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학교)와 ‘살롱’(전시회)을 통해 전파된 그림만이 제대로 된 그림이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과 기법의 그림만을 선택했다. 그에 위반되면 도덕적 침범으로 간주했다. 신흥 중산층, 상공업종사자들은 돈은 있으나 교양이 부족했기에 이전 귀족들의 문화적 취향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모네와 동료들은 가난을 감당하며, 인상주의의 가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인상주의를 당시 프랑스의 중산층들이 선호하게 되면서 모네는 막대한 부와 국제적인 명성을 거머쥐었다. 이런 성공의 대가를 그는 당시 사람들이 깜짝 놀랄 일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지베르니 정원 건립에 돈을 쏟은 이유
그는 그림으로 번 돈을 무성한 풀과 나무, 세계 각지에서 공수한 꽃을 심었고, 굽이치는 둑을 만들고, 구불구불한 길을 내어 물의 정원을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연못과 화단을 색과 높이에 따라 분류하여 대규모 정물화처럼 세심하게 꾸몄다. 이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연못에 필요한 수로를 끌어오기 위해 자신들의 농사를 망치려고 파리에서 온 화가가 일부러 물을 많이 사용한다고 믿은 주변 농부들과 여러 번 충돌했고, 관청에 허가를 요구하는 각종 편지들도 써야 했었다. 이런 귀찮음과 난관을 감당한 이유는 그림때문이었다. 정원이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라는 모네의 말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모네에게 정원은 그림의 잠재태였고 그림은 정원의 발현체였던 셈이다. 그는 정원을 그리기 위해 정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지베르니 정원을 만들면서 그는 <루앙 대성당> 연작도 하나씩 완성해 내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 오후와 저녁의 빛의 온도가 달라지면서 성당 외관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 바뀐다. 모네는 이것을 스물여섯 점의 각기 다른 색채로 빛나는 루앙대성당으로 완성했다. 여기서 시도하여 얻은 결과를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대표작인 <수련> 연작이 세상에 나왔다.
‘잠든 연꽃’이라는 뜻의 수련은 그 이름은 평온하지만, 모네의 <수련>은 색채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언뜻 스치는 모순이 모네가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사랑했던 부인들과 큰아들이 차례로 죽었고, 빛과 색에 탐닉한 결과였는지 백내장으로 회복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모네는 수술로 시력을 회복하지 못하리라 믿었고, 미루고 미루다 하게 된 수술은 실패했다. 유명한 의사가 맞춰준 안경도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나 다름없을 때 작곡을 했듯이, 나는 장님에 가까운 상태로 그림을 그린다.”[1] 이런 악조건 속에서 모네는 생애 후반 30여 년 동안 250여 점의 수련을 그렸다. 역시 명작은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어지는 것일까?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다
모네의 생애를 되짚으면, 그는 성공을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모네는 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도전했다. 같은 것을 반복하면 사는 인생은 그에게는 낭비였다. 성공으로 얻은 결과는 새로운 작품을 위해 투자하자, 성취는 다른 성취로 이어졌다.
[1] 데브라 멘코프, 모네가 사랑한 정원, 김잔디옮김, 중앙북스,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