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76] 매일 이별하며 살고있구나

관리자
2025-02-05


동지(冬至), 양력의 새해, 음력의 새해, 그리고 봄의 시작 입춘(立春)까지. 몇 번을 거쳐 우리는 새해에 도착했습니다. 새로운 해의 뒷면에는 지나간 해와의 이별이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매일 그만큼 이별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시간은 등 떠밀듯 우리를 새해에 데려놓았습니다만, 채 못한 작별 인사는 없는지요. 채 소화하지 못한 지난 이야기는 없는지요. 아주 잠시 돌아보는 것도 삶의 운치이겠습니다. 또다시 내딛는 새날을 향한 걸음에 어제를 향한 따뜻한 감사 인사를, 오늘도 찾아와준 새날에 또한 사랑을 보내면서요.


공자는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고 지천명(知天命)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21세기 쉰의 현주소는 노화의 시작, 직업의 상실, 부모와의 이별, 자식의 독립 등 온갖 상실이 한 번에 다 몰려오는 상실의 계절입니다. 어느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가 현실이 되는 나이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인터뷰의 주인공인 '임상수' 씨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합뉴스에 입사해 34년간 스포츠부장, 미디어 여론독자부장, 산업부장, 경제부장, 마케팅본부장 등을 거쳐오다가 3년 전 기대했던 임원 승진에서 좌절하고 “하늘이 노래졌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야 비로소 체험했다고 합니다. 30년 넘게 집보다 더 오랜 시간 몸을 담은 곳에서 떠나야 할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자, 식욕도 떨어지고, 몸무게도 급격히 줄고, 우울감이 몰려와 불면까지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퇴직 불안은 노후 불안으로 이어지고, 고령으로 누운 아버지와 아픈 아내, 취준생 아들까지... 회사 일을 핑계로 심리적 거리를 두었던 일들이 옥죄어 오기 시작하더니 고혈압, 고지혈증 수치도 급격하게 올라가고 수시로 식은땀으로 속옷을 적셨습니다. 술을 먹어도, 몸을 혹사하는 운동을 해도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지자, 지인의 소개로 정신과 의사인 '강은호 원장'을 만납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된 두 사람은 2년여 간의 대면 상담과 e메일 대화를 나누며 교류했습니다. 생애 처음 상실의 계절을 맞은 중년의 남자와 그를 상담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인터뷰 틈에 들어가 상실의 계절 속 삶의 나침반을 꺼내 들여다보려 합니다.


(강은호 원장, 임상수 씨)

강은호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삼성서울병원 임상강사, 임상조교수, 성균관대 의대 교육부학장보로 일했다. 뉴욕 IPTAR 정신분석연구소, 뉴욕 윌리엄 앨런슨 화이트 정신분석연구소 등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강은호 원장 : 처음 만난 임상수 씨는 공황과 무기력 상태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처음엔 누가 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인데 ‘임원 승진에서 좌절된 것이 무슨 대단한 실패라고 저렇게까지 낙심을 하나’ 했는데 사실 그건 남이 함부로 할 이야기가 못 되죠.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저는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두 가지 요소를 ‘납득’과 ‘의미 부여’로 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심리적으로 일정 정도 납득이 되면 트라우마로 남는 일이 줄어들어요. 그렇지 않으면 작은 일에도 마음의 상처가 심하지요. 가벼운 차량 접촉 사고에도 심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저는 사람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그걸 ‘미닝풀리스(meaningfulness)’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움직이는 엔진, 또 다른 예를 들면 고속 주행하는 차량의 적절한 타이어 공기압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미닝풀리스에 과부하가 걸리면 동아줄에 매달리듯 각종 강박이 나타납니다. 일하는 게 유일한 미닝풀리스이면 워커홀릭이 되고, 돈이 유일한 미닝풀리스가 되면 죽기 직전까지 돈에만 매달리게 되죠. 술을 마실 때만 근심 걱정이 없어지면 알코올중독이 되고요. 그러다 이런 대상이 사라지면 공황 상태가 옵니다.


임 선생은 살아오면서 숱한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왜 승진에서 탈락한 것이 트라우마가 됐을까요? 그건 그것이 임 선생 삶에서 의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죠.


50대의 미닝풀리스

(meaningfulness)



임상수 씨 : 강 원장님과의 작업을 통해 저를 많이 객관화해 바라보게 됐죠. ‘아, 내가 이런 데 문제가 있는 거였구나’, ‘그러면 뭘 해야 되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데, 예전하고는 좀 다르게 하게 돼요. 예전에는 나 자신보다는 주변에 대한 생각이 많았는데 조금씩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알아가면서 더 편안해졌어요. 시간도 약이 됐습니다. 지금 퇴직한 지 한 달이 넘고 그사이 환갑이 되니 여러 가지 것에 대한 집착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강은호 원장 : 상실의 시간을 잘 소화하면서 잘 늙는다는 게 진짜 보통 일이 아니고,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많이 느껴요. 특히 우리나라 50대들은 감정적 반응에 익숙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 세대의 유일한 ‘미닝풀리스’는 ‘생존’이었어요. 먹고사는 것 외에 삶에서 의미 있게 느껴진 것이 별로 없던 그런 세대 밑에서 자라며 우리 역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배운 게 별로 없죠. 한마디로 상실을 어떻게 ‘애도’ 해야 할지 모르고 상실 그 자체에 좀 압도되는 부분이 있어요.


한국의 50대들은 힘들고 어렵고 공허하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이걸 드러내는 자신을 나약하다고 자책해요. 그런 점에서 애도라는 단어를 쓴 겁니다. ‘내가 뭔가를 상실했구나’ 하는 걸 감정적으로 충분히 인식하고 그걸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라는 뜻입니다. 비탈길에 서 있는데 안 내려가겠다고 계속 버티려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게 각종 강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제 주변에 골프장에 거의 프로 선수 수준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력에 좋다고 영양제를 수십 개씩 먹는 사람도 있고요. 여행도 강박적으로 다니는 분들이 있고, 늦바람에 빠진 분들도 있어요(웃음). 너무나 지혜롭고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에 확 빠지면서 통제가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굉장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서요. 그런 걸 옆에서 보면 삶의 동아줄을 마지막으로 붙잡는 것처럼 보여요.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으니 엄청난 힘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강박은 감정을 그저 미뤄놓는 겁니다. 나중에는 2배 3배 더 고통스러운 걸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마음 지진 일어날 땐

진원지 찾고 받아들이기



임상수 씨 :  원장님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깜짝 놀란 게 제가 인생을 너무 경쟁적으로 살아왔다는 거였어요. 앞으로의 인생은 경제적 풍족함과 사회적 지위를 무조건 추종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서 내면이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어요. 무엇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기로 했고요.


돌이켜 보면 지난 30여 년간 유지해 온 직업을 갖기 위해 청소년기 10년을 준비하잖아요. 남은 인생을 좌우할 지금 시기도 너무 조급해하지 않고 신중하게, 충실하게 준비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전보다 좀 많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강은호 원장 : 50대에 새로운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그물을 던지듯이 맹목적으로 찾는 건 지양해야 해요. 이게 도대체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고, 내가 무엇을 정말 좋아하는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죠. 각자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그거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수도 없고 누가 정해 줄 수도 없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들을 찾는 데 집중했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이직을 시도한다든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식으로 환경을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는 시도는 합리적으로 판단한 경우가 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삶의 지진, 마음의 지진이 일어날 때 지표면과 진원지 사이에 완충제를 설치하면 심한 진동이 와도 지표면 위에서는 덜 느끼거나 아예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완충제가 정신과 약물 치료가 될 수도 있고, 운동·취미·독서·명상·요가가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건 전체 구조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런 점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마음의 진원지를 분석해서 자신만이 갖고 있는 내면의 어려운, 취약한 부분이 무언지 알아가는 정신분석이 도움이 됩니다.


중년에서 노년기로 넘어가는 50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타자들, 다시 말해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거나 제거하고 싶었던 나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입니다. 이런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족할 수도 있고 불완전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런 내 안의 ‘타자’들이 결국 나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실의 시간인 50대를 지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2024년 12월, 두 사람의 대화를 묶어 ‘잠 못 드는 오십, 프로이트를 만나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책은 퇴직을 코앞에 두고 몰려오는 불안과 걱정을 임 씨가 잔잔하게 털어놓으면 강 원장이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를 설명하고 조언하며 중년 독자에게 자기 이해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앞으로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노화, 꼰대(의식), 퇴직, 부모, 자식, 자존심, 소외감, 분노, 외로움, 상실 등이 키워드로 구성된 책은 상실의 계절 속 중장년 어른의 내면을 심도 있게 탐구합니다.


위 글은 2024년 12월 29일 발행된 신동아 허문명 기자의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50대, 생애 처음 맞는 상실의 시간에 대하여 (50대, 생애 처음 맞는 상실의 시간에 대하여)"에서 발췌한 글들을 각색/편집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platonacademy.org/28/?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41750373&t=board

(싱어송라이터/음악감독 강승원)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상실의 계절을 대변하는 불멸의 유행가 ‘서른 즈음에’를 만든 강승원 씨를 아시나요?


서강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강승원 씨는 대학 시절 음악 동아리 '에밀레'에서 활동하며 음악적 기반을 다지고 이후 보컬 그룹 ‘우리 동네 사람들'에서 활동합니다. 그는 김광석의 대표곡 '서른 즈음에'의 작사·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노래는 원래 ‘우리 동네 사람들'의 1집 음반의 수록곡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어느 날 김광석 씨가 이 노래를 듣고는 마음에 와닿아 다시금 부르면서 세상에 널리 그리고 이렇게 오래 퍼지게 되었습니다. 강승원 씨는 또한, 1992년 KBS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부터 이문세 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하나의 페퍼민트, 유희열의 스케치북, 최근 더 시즌즈까지 33년째 KBS 심야 음악 방송의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부 역할을 맡아오면서도 정작 싱어송라이터로서 자신의 첫 개인 음반은, 그의 음악 활동 40주년을 기념하며 몇 해 전 2017년에 발매되었습니다. 첫 개인 음반 [강승원 일집]의 타이틀 곡인 ‘나는 지금 (40 Something…)’은 상실의 계절을 맞이한 청춘의 끝자락을 노래했던 ‘서른 즈음에’에서 또 한 시절이 흐른 뒤 주인공의 심정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울부짖습니다. 이 노래는 가수 이적의 목소리를 빌려 발매되었으나, 스스로 싱어송라이터일 때가 가장 저답고 좋다는 강승원 씨의 버전을 추천하여 남겨드립니다.

강승원 <나는 지금 (40 Something...)>


어쩌면, 시작과 끝이 없이 늘 같은 시간을 두고 우리는 '묵은해, 새해, 어제, 오늘'을 나누어 말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 한 번 반복 없이 나날이 새로운 날이니까요. 순간순간 새 순간이니까요. 우리가 새해라 부르는 올해의 끝자락까지, 모두 무탈하시고, 안전하시고, 늘 평안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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