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15] 자크루이 다비드, 비겁한 배신자인가? 처세의 달인인가?

김은희
2023-11-29


예술가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살펴보는 예술인문학자 이동섭 작가의 두 번째 칼럼입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프랑스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입니다.


자크루이 다비드, 비겁한 배신자인가? 처세의 달인인가? 


인간은 장점으로 몰락한다. 
묵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두 번째로 유명한 그림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기록한 <황제의 대관식>이다. 그런데 그림의 유명세에 비해 화가의 이름은 거의 잊혀진 듯하다. 어쩌다가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는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루이 16세와 괴테의 극찬을 받은 화가 

 

“사람들의 눈앞에 영웅적 행위와 시민적 덕목의 특징을 보여주면, 영혼은 전율하고 아버지의 땅에는 영광과 충성의 씨앗이 뿌려질 것이다.” _ 다비드

 

다비드는 고전적인 이상과 아름다움으로 역사화와 초상화를 그려내는 실력뿐만 아니라, 그림의 주문자가 원하는 메시지를 간파해서 절묘하게 녹여내는 정치적 감각도 갖췄다. 루이 16세의 첫 번째 주문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이 대표적이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 호라티우스 형제들은 서로의 몸을 뭉쳐 하나로 만들고 손을 곧게 뻗어 아버지(조국)에게 향한다. 국가를 향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저 강건한 팔들에 단단히 배어 들끓어 오르고 있다. 로마에서 이 그림을 직접 본 괴테는 ‘프랑스 학파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로 다비드의 실력을 극찬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그림은 고귀한 이념을 전파하는 수단

이처럼 다비드의 그림은 권력자들의 구미에 딱 맞았다. 왕은 그에게 두 번째 주문했다. 그러자 다비드는 고대 로마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연 초대 집정관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왕이 주문한 그림에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연 정치인이 주인공이라니?’ 더욱 놀라운 점은, 그림이 완성됐을 때는 프랑스가 공화정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평소 신념대로 공화주의자로서 왕정을 비판했다는 의견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기회주의적 처세라는 비난으로 다비드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뉘었다. 게다가 그는 혁명의 주축 인물들과 친분을 쌓으며 혁명정부의 미술계 일인자로 등극한다. ‘짐이 곧 신고전주의’라며 위풍당당하게 왕정을 찬양하던 그가 ‘짐은 곧 공화정의 대변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마라의 죽음>은 확실한 증거다.

마라의 죽음, 1793년


사실을 비틀어 상징으로 완성   

마라는 혁명 초기에 <인민의 친구>을 발간하며 여론 형성에 막강한 힘을 발휘한 언론인이자,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혁명에 반대하는 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한 급진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공포정치를 주도한 그를 죽이는 것이 프랑스를 위한 길이라 믿었던 샤를로트 코르데는 치밀한 계획 끝에 암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정부는 다비드에게 마라의 공개 장례식에 사용될 그림을 다비드에게 주문했고, 다비드는 몇몇 사실을 비틀어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안타깝게 죽은 혁명의 순교자로 표현했다. 보다 정확한 정황을 담은 폴 자크 에메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에서는 마라가 목욕하다가 죽은 남자로만 보인다. 이렇듯 다비드는 사실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주문자인 공화정 정부의 의도에 맞는 작품을 완성했다.


폴자크에메보드리, 마라의 죽음, 1860년

하지만 공화정이 몰락하고 나폴레옹이 권력의 태양으로 부상하면서 영광의 시간은 끝났다. 단두대에서 사라진 동지들과 달리 그는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곧 석방됐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 동참해달라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거절했다. 아마도 정치에 너무 깊이 발을 담갔다가 감옥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에 더이상은 권력자들과 얽히기 싫었던 마음이 컸으리라. 그러나 운명은 그를 야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살아있는 영웅 

 폴들라로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48년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실제 모습은 농부가 이끄는 노새를 탄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 가깝다.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
잘 관리된 흰말을 타고 오렌지 망토를 휘날리며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다비드의 나폴레옹은 살아있는 영웅 그 자체다. 들라로슈의 나폴레옹이 다큐멘터리라면, 다비드의 나폴레옹은 할리우드 영화다. 당연히 황제는 후자에 만족했고, 다비드에게 신의 영광을 불멸로 기록할 대관식을 그리도록 한다. 이것이 루브르에서 두 번째로 유명하고 큰 그림이자, 신고전주의의 완성작으로 꼽히는 <황제의 대관식>이다.

황제의 대관식, 1806-7년

변절자 낙인이 찍힌 이유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왕당파가 재집권했다. 왕정과 공화정, 제정까지 40여 년에 걸쳐 최고 권력자의 옆자리를 지킨 다비드는 자신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왕당파를 피해 브뤼셀로 망명했다. 그곳에서도 황제와 교황을 그렸던 화가의 영광과 부귀를 마음껏 누리다가 77세로 둘째 아들의 품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프랑스 혁명이 공화정으로 안착되었고, 다비드는 더러운 변절자나 혁명의 배신자로 여겨졌다. 그의 그림들은 지워지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에서 영광은 지워졌다. 왜냐하면 자크루이 다비드는 고난을 피해 성공의 꽃길만 걸으려 했고 권력의 양지만 좇은 부역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점으로 몰락한다.

 

묵자의 말이다. 권력자의 의도를 간파하는 탁월한 능력과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능력, 처세술 등이 탁월하여 40여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바로 그런 장점들로 다비드는 프랑스 역사에서 대표적인 부역자이자 변절자로 기록되었다. 겨울을 견뎌야 봄꽃은 세상과 만난다. 삶도 고난을 통과하면서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자화상, 1794년




구독 링크 공유하기! 👉공유하기
지난 호가 궁금하다면? 👉보러가기
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