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11] 아무리 되물어도 목마른 질문, '인간다움'에 대하여

이치훈
2023-11-01


겨울의 문턱 앞에 선 11월의 첫날입니다. 다가오는 계절을 알리듯 아침저녁으로 공기는 귓불이 시릴 만큼 찬데, 낮에 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내린 산의 풍광은 여전히 짙은 가을 향이 그윽합니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던 지난 주말, 경북 안동에서는 올해로 열 돌을 맞은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이 열려 국내외 석학과 인문학자들, 시민과 학생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간다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한 전염병 확산, 전쟁, 기후변화 등의 복합위기 속에서 극복 방안을 모색하고, 한류 속 인문 가치와 인공지능(AI)의 발전이 인간 본성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인간다움'의 가치와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회복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 사흘간 열렸습니다.


현시대에 필요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모색하고, 현대 사회 문제의 해답을 '유교적 가치'를 통해 찾고자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을 1회부터 기획하고 조직하여 10년간 이끌어 온 김광억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다움'은 무엇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또 되물어 보고자 합니다. 김광억 교수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사회인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 역임, 베이징대와 산둥대 특임 일급 교수를 지낸 중국 전문가이며, 30여 년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문화의 정치와 지역사회의 권력구조: 안동과 안동김씨(2012)>를 펴내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문화가 어떻게 정치적 자원으로 작동하는지를 밝히고, 문화의 정치학에 관한 이론을 개발하였습니다.

"유학이란 게 고리타분하고 시대 변화에는 잘 다가오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요즘 현실인 것 같습니다만, 유학의 핵심 가치는 ‘사람’입니다. 안동의 인문 가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전통 유학을 단지 재생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현대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사람다움’의 가치관을 모색하려 하는 겁니다.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나는 유학(儒學)을 더욱 확대 해석하려 합니다. 공자·맹자·주자·퇴계 이런 분들이 말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고전적 해석을 넘어서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예술의 영역을 통합해 '인간다움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성찰해 보자는 것이 오늘날의 ‘유(儒)’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으로 우리들 삶의 세계가 전혀 새롭게 변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기존의 인간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가치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의 인문 가치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추구돼야 합니다.


경북 안동은 전통과 역사의식이 강한 지역으로, 오랫동안 유학을 기본으로 한 인문 가치에 대한 고민을 이어온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같은 유학자가 배출된 곳이고, 도산서원, 하회마을, 봉정사 등 유교적 가치 위에 지어진 건축물도 많을뿐더러, 독립운동가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의 고장'이라 불리는 안동의 인문 가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한 일화를 전해드립니다.


“퇴계는 조선 유학의 틀을 잡은 학자입니다. 그의 학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 발전하여 세계 유학계에서 ‘퇴계학’이란 이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퇴계의 위대함은 학문도 학문이지만 그 실천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가정 안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면 그의 인격이 드러나는데 개인적으로 퇴계를 정말 대단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표적 일화가 있습니다.


서울에 살던 퇴계 손자가 아들을 낳았어요. 퇴계 증손자지요. 그런데 손주며느리가 젖이 부족해 다 죽어가게 된 거예요. 손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본가에 연락해 젖어미로 노비 한 사람을 찍어 보내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노비에게도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아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퇴계는 손자에게 ‘내 자식 살린다고 남의 자식 죽이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거절하고 다른 방도를 구해 보라는 간곡한 가르침의 편지를 보냅니다. 안타깝게도 증손자는 두 돌을 갓 넘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퇴계는 두고두고 피눈물을 흘렸겠지요. 하지만 혈육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자제하고 생명의 존엄성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다는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지요. 퇴계는 신분제로 고착화된 계급사회에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했어요. ‘사람다움’ 혹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보편적 가치와 윤리로 삼아 이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위 글은 2023년 10월 04월 발행한 [신동아X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 안동 인문가치포럼 이끄는 '김광억 서울대 명예교수' 편에서 발췌한 글들을 각색/편집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처음의 마음으로, 스스로 거듭 물어봅니다.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위 노래는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둔 합창단 'Shards'의 리더 Kieran Brunt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따른 봉쇄 조치로 예정되어 있던 모든 공연과 예술 활동이 취소되고 생계 수단마저 잃어버린 채, 자신의 작고 막막한 방 안에서 만든 음악입니다. <Inside I'll Sing(이 안에서도 나는 노래하겠어)>. 그는 당시의 상황과 감정, 미래에 대한 고민과 희망을 고스란히 담아 작곡한 곡을 온라인을 통해 국내외 음악가 동료들에게 각자의 집에서 노래를 녹음해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그 갇힌 방 안에서의 목소리들이 하나로 붙여져 만들어진 곡입니다. 우아하고 유려하기보다는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 새롭고 낯선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곡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지닌 악기인 목소리들이 연주한 목가적인 선율과 따뜻한 화음은 시린 귓불과 가슴을 훈훈하게 데워줍니다.


지난 5월 WHO의 코로나19 비상사태 선포 해제가 발표되며,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은 3여 년의 팬데믹 속 생활에서 벗어나, 어느새 다시 모든 것이 당연해진 듯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늘 목마른 사람처럼 물어볼 일입니다.


김광억 교수의 인터뷰 중 선비의 의미에 대한 말을 덧붙입니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하면서도,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업으로 삼는 사람을 선비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진리를 담고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선비란 곧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도덕적 존재이지요. 선비 정신은 그러한 정신적 자세를 실천하는 마음가짐이며 가치관입니다. 어쩌다 관직에 나아가더라도 선비로서의 자세와 가치, 도덕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도덕이 결여된 지식인이나 혹은 도덕성은 있어도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선비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에 와서 오히려 더욱 선비와 선비 정신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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