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저자/아티스트 : 케이시 윅스 (지은이), 제현주 (옮긴이)

출간일(출시일) : 2016-09-15

ISBN13 : 9788972977780

출판사(제작사/출시사) : 동녘

요약 : 노동시간 자체의 단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반노동(antiwork), 탈노동(postwork) 의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임금노동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기존 노동윤리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추적하고, 나아가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대안까지 제시한다.

책소개 : 미국 여성학자이자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노동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는 임금노동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좋은 것(善)이라는 전제에 반기를 든다. 우리가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을 ‘탈정치화’시켜 왔다고, 즉 정치적 비판 영역에서 일을 배제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특정한 직업,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노동 자체에 대해서는 정치적 논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일의 문제를 다시 정치의 문제로 되가져온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넘어 일하기 위해 사는 데에는 산업화 시대와 탈산업화 시대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노동윤리가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근면한 노동을 요구했던 과거 노동윤리부터, 노동자의 근면한 손뿐 아니라 마음과 감정까지도 요구하며 일을 즐기는 프로페셔널이 되도록 내몰리고 있는 탈산업화 시대 노동윤리까지, 변화해 온 자본주의 구조 저변에 흐르고 있던 노동윤리의 변화를 면밀히 살핀다.

노동조건 개선과 무급노동 가치를 인정하라며 싸워왔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포함한 진보적 정치 운동마저도 노동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활동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함께 지적하며 노동윤리의 강력한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서 임금노동으로 좁게 규정지어진 일의 개념을 확장하고 반노동(antiwiork) 담론과 탈노동(postwork)사회로의 정치적 상상의 단초를 다시 끌어올린다.

먼저 저자는 무급 가사노동의 유급화를 주장하던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을 재해석하는 데서 출발해, 과거의 노동윤리를 거부하고 기본소득을 요구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기본소득에 이은 저자의 요구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특히 일-가족 균형을 노동시간 단축의 근거로 삼는 것을 경계하며, 가족의 이름보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성취하기 위해 싸우자고 제안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 더 많은 일자리, 더 높은 임금을 넘어 “일에 맞선 삶”으로!

야근과 과로가 특권이 되고,
근면한 노동을 넘어 일을 즐기기까지 해야 하는 시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넘어 일하기 위해 사는
노동사회를 향한 일침과 탈노동을 향한 담대한 요구!


“이 탁월한 책은 탈노동사회를 건설하려는 기획이야말로 노동의 진정한 해방은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기획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_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더 적은 일, 아니면 더 나은 일? 노동 소외가 정치경제학적 비판의 초점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노동이 삶에서, 생산성이 자신의 가치에서 중심이 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까? 케이시 윅스는 이런 질문들로부터 페미니즘 노동 이론을 쌓아 올린다. 그 결과, 윅스는 1970년대 가사임금 요구를 자율적 마르크스주의의 맥락에 가져다 놓으면서 제2기 페미니즘을 새롭게 조명하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나아가 자율적 마르크스주의가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에 어떤 빚을 졌는지 상기시킨다.”_리사 디쉬Lisa Disch, 미시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내가 오랜 기간 읽어 온 사회 이론 저술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독창적인 책 중 하나이다. 케이시 윅스의 주장은 대담하며, 매우 훌륭히 전개된다. 그 명확함에 놀라며 마지막 장까지 놓지 않고 읽게 된다. 비판적 사회이론들을 통찰력 있게 엮어 냈다. 그야말로 놀라운 책이다.”_주디스 그랜트Judith Grant, 《페미니즘의 근본Fundamental Feminism: 페미니즘 이론의 핵심 개념에 대한 논쟁》의 저자

“일 vs. 일”에서 “일 vs. 삶”으로

한국사회 역시 틀림없는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고 있으며, 경기는 날이 갈수록 나빠진다. 청년들의 실업률은 해마다 증가한다. OECD 국가 기준 작년 대비 청년실업률이 증가한 5개국 중 하나고, 1999년 통계 집계 기준 변경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이처럼 경기가 나빠지고 취업난이 심각해질수록 안정적이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일자리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일하는 것, 그러니까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야근을 하고 과로를 하는 것 자체가 특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산업에서 나타나는 저임금, 실업, 불완전 고용,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에게 닥친 불안정 고용 등이 모두 일과 관련한 문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과로는 많은 경우, 고용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특권적인 형태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11~12쪽)
그래서일까? 최근 노동과 관련된 의제는 주로 실업률, 최저임금, 고용의 형태(가령 정규직/비정규직) 등 ‘일자리’의 수와 안정성, 그리고 ‘임금’의 문제에만 여전히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더 높은 임금, 더 많은 일자리와 안정적 일자리는 당면한 주요 과제이고 많은 이들에게 절박한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통해 생계유지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까지도 증명을 받는 것이 현대 노동사회 일의 의미다(물론 이 책은 생계유지를 위해 왜 꼭 임금노동을 해야만 하는지 그 전제에 대해서도 본질적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일은 경제적 실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두가 일해야 한다는 사실, 즉 대부분이 임금을 벌기 위해 일하거나, 임금을 버는 사람의 부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경제적 필연이라기보다는 사회 관습이자 규범 장치이다.”(20쪽) 또한 일의 문제는 생계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사회에서의 정체성, 지위 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도 제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임금노동은 좋은 것인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그리고 이런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토록 오래, 열심히 일해야 하고, 심지어 일을 즐기기까지 해야 하고, 삶의 에너지 대부분과 중요한 부분을 돈을 벌기 위한 일에 내어 줘야 한다면, 과연 최저임금이 상승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고, 더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된다고 한들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더 좋은 일자리, 더 많은 임금을 향한 노력, 그러니까 일을 둘러싼 담론의 구도가 “일 대(對) 일”이 아니라 저자가 제안하는 것처럼 일에 맞선 삶, 삶의 중심에서 어떻게 하면 일을 더 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대(對)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언제부터 일을 줄이고 삶을 누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일을 얻어 내고자 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인가?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노동윤리와 가족윤리의 공모


미국의 여성학자이자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노동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는 임금노동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좋은 것(善)이라는 전제에 반기를 든다. 저자는 우리가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을 ‘탈정치화’시켜 왔다고, 즉 정치적 비판의 영역에서 일을 배제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특정한 직업, 일자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현대사회의 노동 자체에 대해서는 정치적 논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일의 문제를 다시 정치의 문제로 되가져온다. “노동윤리의 핵심에는 성실한 노동, 긴 시간의 노동이 고결할 뿐 아니라 그런 노동이 불가피하다는 가정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은 반박되기는커녕 제대로 검토되어 본 적도 별로 없다. 어째서 일하고, 어디서 일하고, 누구와 일하고, 일할 때 무엇을 하고,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가 사회적 합의이고, 따라서 당연히 정치적인 결정인 것이라면, 이러한 영역 중 더 많은 부분을 어떻게 해야 토론과 쟁투의 범위로 되찾아올 수 있을까?”(63쪽)

저자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넘어 일하기 위해 사는 데에는 산업화 시대와 탈산업화 시대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노동윤리가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근면한 노동을 요구했던 과거의 노동윤리부터 모두가 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요구(가령 미국의 경우 일을 해야만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기도 했다)와 노동자의 근면한 손뿐 아니라 마음과 감정까지도 요구하며 스스로 자기관리의 주체가 되어 가치를 창출하고 일을 즐기는 프로페셔널이 되도록 내몰리고 있는 탈산업화 시대의 노동윤리까지, 변화해 온 자본주의의 구조 저변에 흐르고 있던 노동윤리의 변화를 면밀히 살핀다. 또한 노동조건의 개선과 무급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라며 싸워왔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포함한 진보적 정치 운동마저도 노동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활동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함께 지적하며 노동윤리의 강력한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여기에 더해 저자가 노동사회를 유지시키는 데 노동윤리 만큼의 강력한 기제로 작동해 온 것이 바로 가족윤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가족 제도는 임금노동의 중요한, 잘 드러나지 않는 요소로 이는 “임금을 버는 이들의 임금을 벌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회관계로서 실업자, 노인, 병자, 아이, 그리고 주부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범주이다”(192쪽). 또한 가족 제도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회적 재생산의 사유화된 장치다. 가족 내에 무급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이 없어 사회적 재생산의 기능을 하지 않을 경우 개인들은 가정 내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상품화된 등가물을 통해 확보하거나 임금노동을 한 이후에도 시간이 충분해 그것을 직접 생산해야 한다. 즉 임금은 더 높아야 하고 노동시간은 더 짧아져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 사유화된 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가족 제도는 노동 가격 인하를 흡수하고 저렴하고 더 유연한 여성화된 노동 형태를 제공하고,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사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페미니즘의 오래된 지적이다. 젠더 분업을 포함하는 가족윤리는 노동윤리와 더불어 지금의 노동시간제와 임금노동의 구조를 지속적으로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이다. 옮긴이는 저자의 주장에 이어 이렇게 지적한다. “두 윤리의 공모 아래, 우리는 마치 과로가 특권인 양 끝없이 일하며, 이에 더해 당신이 ‘일하는’ 여성이라면, 직장에서는 덜 받고 일하고 집에서는 아예 받지 못하고 일한다. 심지어 집에서의 일은 일로서 대접받지도 못하며, 그 탓에 임금노동을 하지 못한 시기는 ‘경력이 단절된’ 시기로 취급받는다.”(362쪽)

일을 넘어선 삶을 향한 대담한 요구
:조건 없는 기본소득, 주30시간 노동에서 시작하는 탈노동사회를 향한 전망


저자는 생산 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만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서 임금노동으로 좁게 규정지어진 일의 개념을 확장하고 반노동(antiwiork) 담론과 탈노동(postwork)사회로의 정치적 상상의 단초를 다시 끌어올린다. 바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임금 감축 없는 노동시간 단축(주30시간 노동)이다.
먼저 저자는 무급 가사노동의 유급화를 주장하던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을 재해석하는 데서 출발해, 과거의 노동윤리를 거부하고 기본소득을 요구하자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기본소득은 가사노동과 같은 무급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노동조건(생산 및 재생산 부문이 상호침투적으로 변하고, 무급노동과 유급노동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풀타임 종신고용직이 사라져가는 변화들)에 훨씬 잘 부합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공되는 기본소득은 무엇보다 노동윤리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준다. 그리고 이때 “돈을 버는 일이 다른 모든 정치적 또는 창조적 활동에 앞선다는 ‘상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363쪽) 기본소득에 이은 저자의 요구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특히 저자는 일-가족 균형을 노동시간 단축의 근거로 삼는 것을 경계하며(전통적 가족규범을 강화하므로), 가족의 이름보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성취하기 위해 싸우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얻어낸 시간은 임금노동 밖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시간,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노동과 비노동의 윤리, 돌봄과 사회성의 새로운 실천을 구성할 공간을 창조할 시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더 나은 노동을 위한 투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더 적은 노동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역시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바 있다. 하지만 늘 이런 주장에 비판적인 논자들은 “현실적이지 않다”라는 말로 응대를 하곤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새로운 방식의 일하기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옮긴이의 말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 “누군가에게 이런 요구들은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낭만적인 유토피아주의로 폄훼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한 장을 통틀어 주장한다. 유토피아는, 제대로 쓰일 때, 한계를 짓기보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 다른 세상을 가능할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다른 세상이 가능한 듯이 요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는 이 책을 옮기면서 그렇게 믿게 되었다.”(363쪽)
끊임없이 일하도록 요구받는 동시에 언제나 불안감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일을 일자리와 직업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사회와 개인의 삶을 구축하는 근본적 축으로 조망하는 관점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노동사회와 일을 고민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