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인문 플랫폼 인문360과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철학[인문문화연구] 제대로 내려놓기: ‘멍’과 함께 명(明)을 (조성택 교수)

2022-11-07


나는 보여 진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로 나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얻기는 어렵다. 정보가 지식이 되고 지식이 삶의 지혜가 되는 시간의 축적, 숙고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촘촘한 연결망 속에서 나 자신과 지내는 시간은 없다. 나의 존재증명은 사유가 아닌 인터넷 시공간에서 벌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의 말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제 “나는 보여 진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명제에 밀려버렸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 자신이 여기에 있음이 확실하게 증명되는 시대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 ‘고독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사람이 생각을 ‘그러모아’ 숙 고하고 반성하고 창조하는 능력, 그 마지막 단계에서 타인과의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맛보지 못 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21쪽]



‘고독’, 혼자 있음은 나 자신과 지내는 시간이며, 오롯이 나를 만나기 위한 공간이다. ‘고독’이라는 시공간에서 나 자신과의 대화를 우리는 사유(思惟) 혹은 생각이라고 한다. 사유의 전형을 보여주는 두 예술적 조형물이 있다. 국립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과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두 작품은 창작의 배경도 다르고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도 다르다. 미륵의 ‘사유하는 모습’은 싯다르타가 유년시절 초선(初禪)의 경지를 경험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몰입의 행복감을 경험한다. 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는 ‘평온한 몰입’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근대적 인간의 상상력으로,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실존 앞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앉아 있지만 약간은 불안정한 포즈, 그리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근육의 긴장은 ‘치열한 몰입’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평온한 몰입’과 ‘치열한 몰입’, 그 각각의 의미와 차이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지금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미륵보살의 평온한 숙고의 모습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로댕의 ‘사람’이 보여주는 진지한 숙고의 모습도 찾기 어렵다. 오로지 ‘보여 지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이다. 한 때 남대문 시장의 명물 구경거리였던 ‘골라! 골라!’를 외치는 모습들과 다르지 않다. 지나는 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올라서서 발을 구르며 특이한 행색과 목소리로 외쳐대던 ‘골라! 골라’족들이 인터넷에 넘쳐 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가하는 것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것, 귀하게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나다운 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를 보여주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골라! 골라!’ ‘좋아요!’가 전부다.

상호연결을 뜻하는 인터넷은 이제 서로를 옭아매는 ‘그물망’이 되어 버렸다. 그물망에 갇힌 물고기들이 벗어나고자 팔딱거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고통을 주는 형국이다. 인터-넷(Inter-Net)의 그물 안에서 모두가 지쳐가고 있다.


멍 때리는 사람들

멍 때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과도한 접속과 정보에 지친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한결 같이 집착, 욕심, 불만, 경쟁 등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머리를 비우고’ 싶다고 한다.

원래 ‘멍하게 있는 것’은 주어진 일이나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할 것이고 꾸지람과 질타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과도한 스트레스 상태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멍하니 있는 상태’가 뇌의 활동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신경과학과 심리학 분야의 연구결과가 소개되기도 하면서 일부 사람들에게 ‘멍 때리기는’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쉬게 하는 적극적 행위로 까지 인식되고 있다.

이제 멍때리기는 MZ 세대를 중심으로 일종의 생활 트렌드가 되고 있다. 그간의 불멍이나 물멍만이 아니라 달멍, 비멍, 바다멍, 숲멍 등 다양한 멍때리기가 등장하고 급기야 ‘누가 누가 멍 잘 때리나’를 겨루는 대회까지 열리고 있다.

2014년 10월 서울시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하에 서울광장에서 제 1회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 속에 국내 대회는 물론 대만, 네델란드, 중국 등 해외에서도 국제대회를 매년 이어가고 있다. 올해 6월에도 힐링의 핫플로 알려진 서귀포 웰니스 숲 힐링 축제에서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숲 멍때리기 대회’가 주요 프로그램으로 포함되었으며 지원자가 많아 3:1의 경쟁을 통과해야했다.

대회는 90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오래 유지하는 것을 기준으로 우승자를 선발하는데 만약 크게 움직이거나 딴 짓을 하면 실격패를 당한다. 참가자들은 모두 심장박동 측정기를 장착해야 하며 매 10-15분마다 측정하는 심박 수가 가장 안정적으로 나오는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서울광장에서 열렸던 제 1회 대회에서는 9살 초등생인 김모 양이 대회 우승자가 되었으며 우승자에게는 상장과 함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의 트로피가 수여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멍때리기 열풍은 해외에서도 큰 관심거리다. 작년 11월 워싱턴포스트지(WP)는 서울발 기사로, 서귀포 웰니스 숲 힐링 축제에서 열린 멍때리기 대회와 함께 한국의 멍때리기 열풍을 소개하였다. 올 2월 미국의 NBC 방송 The Today Show는 “Hitting mung. Stressed Out? Try South Korean wellness trend ‘hitting mung’” (멍 때리기. 과도한 스트레스로 지쳤나요? 한국의 웰니스 트렌드 ‘멍때리기’를 경험해 보세요)이라는 제하로 디지털 환경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기 위한 활동으로 한국의 멍때리기를 소개한 바 있다.

 

머리를 비운다고 가슴까지 비워질까?

멍 때리기 대회가 ‘뇌를 쉬게 하고’ ‘스트레스로 지친 심신을 회복’한다는 취지에 과연 도움이 될까? 한 참가자는 “멍 때리기는 쉬워도 멍 때리기 대회는 쉽지 않다. 멍 대신 번뇌가 가득 찼다”는 후기를 남기고 있다. 탈락과 경쟁, 우승자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는 결국 또 다른 경쟁과 긴장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닐까?

멍 때리기의 실제적 장기적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쉬게’하는 목적으로 멍을 때린다고 한다. 집착과 긴장을 해소하고, 초조불안과 같은 부정적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 멍을 때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멍때리기는 얼마만큼의 실제적인 효과가 있을까? 앞 서 언급한대로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에서는 멍때리기의 긍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잠깐의 ‘휴식’을 통한 리부팅 혹은 리프레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효과, 이를테면 내려놓았던 마음이 다시 올라 오지 않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그러한 효과는 장기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일시적인 상태의 경험으로 의식이 변하긴 어렵다. 어망 안의 물고기가 벌어진 그물망 사이에 코를 박고 잠깐 숨을 돌렸을 뿐 돌아서면 또 다시 어망 안이다. ‘오 분 간 휴식’을 마친 훈련병이 다시 연병장을 빡빡 기어야 하듯이, 멍 때리는 달콤한 휴식이 끝나면 마찬가지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잠시 쉬다 다시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던 길을 다시 또 가야한다.

머리를 비운다고 가슴까지 비워지는 것은 아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36센티 정도에 불과하지만 삶에서 두 곳 간의 거리는 멀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하셨다. 입으로, 머리로 하는 관념적 사랑이 가슴으로 내려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으로 실천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말씀이다. 물론 그 분 다운 겸손의 말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머리와 가슴의 거리는 멀디멀다. 머리를 채운다고 가슴이 채워지지 않듯이, 머리를 비운다고 가슴도 비워지는 것은 아니다.

 

‘멍’과 함께 ‘명’(明)을 찾자

멍때리기는 ‘멍’이라는 표현이 그러하듯 일반적으로 머리, 생각,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마치 쓰레기통을 비우듯 잡다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비워내고 깨끗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은 쓰레기통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이 쓰레기만으로 꽉차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법륜스님의 다음 말씀은 ‘비움’의 진정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단식을 하면서 명상을 하면, 내가 욕심으로 하려고 했던 일, 어리석음으로 하려고 했 던 일, 성질을 내면서 하려고 했던 일들이 모두 없어집니다. 비로소 정말 해야 할 일, 배고픔 속에서도 놓아지지 않는 일이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원 (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은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중에서>


‘비운다’의 진정한 의미는 ‘버려야 할 것’과 ‘찾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그 기준은 지혜다. 아무런 지향점이 없이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지혜를 가리고 있는 욕심, 어리석음, 화 등과 같은 그릇된 생각을 비우는 것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그냥 ‘텅 빈 상태’가 아니라 ‘고요함’을 뜻하는 것으로, 지혜가 드러나는 바탕이다.

‘마음의 가난’을 강조하는 성경 말씀을 비롯해서 인류의 오랜 지혜전통은 ‘비움’의 의미와 지향점을 다양한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에는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표현이 있다. ‘밝은 거울과 같이 고요한 물’을 뜻하는 말이다. 흐르는 물, 혼탁한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 고요한 물(止水)이라야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밝은 거울(明鏡)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고요한 물’이 비워진 마음의 상태라면 ‘밝은 거울’은 지혜를 상징한다. 물이 흐름을 그치고 고요해지면(止) 그 물은 곧바로 밝은 거울이 되듯이, 생각이 고요해지면 곧 지혜(明)가 발현된다. 그러나 ‘밝은 거울’이라는 지향점이 없다면 지수(止水)는 ‘흐르지 않고 괴여있는 물’일 뿐이다.

불교 명상 전통의 지관(止觀)은 생각을 비우되 무엇을 찾고, 어떻게 지향할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지(止)란 고요한 마음의 상태다. ‘보는 것’을 뜻하는 관(觀)은 지혜를 뜻하는 것으로, 넓게 보자면 지적 사유 활동을 포함하는 말이다. 지관의 지혜(觀)는 ‘고요한 마음에 비춰진’ 것 일뿐 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적극적 활동이기도 하다. ‘비춰진 것’이 지혜의 수동적 모드(passive mode) 모드라면 ‘비추어 보는 것’은 지혜의 능동적 모드(active mode)다. 동서양 전통에서 지혜는 흔히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내는 ‘밝은 거울’과 대상을 밝게 비추는 ‘빛’에 비유되어 왔는데 이는 각각 지혜가 작동하는 두 가지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관 전통은 ‘밝은 거울’과 같은 ‘수동적 모드’의 지혜 그리고 ‘빛’과 같은 능동적 모드의 지혜, 둘 다를 지향한다.

미륵보살의 ‘평온한 몰입’은 모든 상념이 멈춘 고요함(止)이 아니다. 고요한 가운데 활발한 사유(觀)가 작동하고 있다. 불교 명상 전통은 이를 지관겸수 혹은 지관쌍수라고 한다. 지(止)와 관(觀)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 서 언급한 로댕의 ‘사람’이 보여주는 ‘치열한 몰입’이란 ‘지(止)가 부재한 가운데 대상에 집중하는 사유’를 말한다. 지옥의 문을 내려다보며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치열한 사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안정한 자세와 긴장된 몸의 근육이 말해주듯 그의 마음의 상태는 고요가 아닌 고뇌의 상태다.

한편 ‘관(觀)이 부재한 지(止)’의 상태는 지향점이 없는 멍때리기와 유사하다. 많은 명상 지도자들은 차라리 망념이나 잡념을 하는 것이 ‘멍한 상태’보다 낫다고 한다. 생각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라면 잡념이나 망념을 돌이켜 지혜로 갈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만, ‘멍한 상태’에서는 지혜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이 ‘그친’ 상태와 생각이 ‘활발한’ 상태를 상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멍때리기’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경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도한 긴장과 몰입 상태를 해소하고자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 서 언급하였듯이 마음의 진정한 휴식과 평화를 원한다면 ‘멍때리기’의 실질적, 장기적 효과는 없거나 미미한 정도다.

근년의 신경과학(Neuroscience) 분야에서는 최적의 의식 상태를 ‘이완된 각성’(relaxed alertness), 이완된 집중(relaxed concetnration) 혹은 ‘평온한 각성’(restful alertness) 등으로 표현한다. 이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의미하는 바는 지관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관겸수의 상태다. 이러한 상태는 공부 일 등에 있어 ‘최적의 학습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며, 인지와 정서처리 기능이 활성화 되면서 정신 건강에 좋은 상태라고 한다. 또한 ‘이완된 집중’ 상태는 몰입한 후에 나타나는 피곤한 상태와는 달리 명료한 의식과 함께 에너지가 솟아나는 사태를 경험한다고 한다.

‘멍’하기만 한 상태를 혼침(昏沈)이라고 한다. ‘어둡고’ 바닥으로 ‘가라앉는’ 마음의 상태다. 어두운 마음 보다 밝은 마음, 정신이 혼미한 것보다는 총명(聰明)함이 더 낫지 않겠나? ‘멍’만으로는 부족하다. ‘멍’과 함께 ‘명’(明)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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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본 저작물은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의 [연구[인문문화] 제대로 내려놓기: ‘멍’과 함께 명(明)을 (조성택 교수)]를 출처로 기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