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대 특히 여성들은 한국문화를 멋짐의 대명사로 받아들인다. 한국친구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멋지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의 경우 아빠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친구들이 부럽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고 한다. (중략) 트위터 등을 보면 트와이스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듣고 우울증이 나앗다라던가, BTS의 노랫말을 인용하며 ‘내 자신을 소중히 해야겠다’ ‘자살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하는 멘션이 차고... ...
갑자기 한국드라마에 빠진 일본인 아내
▲ 드라마 <도깨비> 일본판 홍보 포스터
“도깨비 다 봤어. 이제 <이태원클라스> 볼 건데 이건 꼭 같이 보자.”
결혼한지 19년째에 접어드는 동갑내기 일본인 아내는 요즘 한국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2003년 제1차 한류붐이 불었을 때도, 동방신기나 소녀시대가 등장했던 제2차 한류붐 때도 전혀 한국문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사랑의 불시착>, <도깨비>, <별에서 온 그대>를 봤다. 이 세 작품, 나는 이미 본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아직 못 본 <이태원클라스>만큼은 같이 보자고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다. 19년 동안 한국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궁금하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 일단 시온이(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시간이 생긴 게 가장 크고, 요즘엔 취미생활이 넷플릭스 밖에 없어. 코로나 때문에 수예부도 올스톱이고 마쓰리(동네축제)도 다 중지니까. 넷플릭스 들어가면 한국드라마를 그렇게 추천해대는데 어디 안 볼 수가 있어야지. 근데 또 한번 보니까 엄청 재미나더라고. 예전 <겨울연가> 같은 그런 닭살 돋는 느낌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고 하나 다 보고 나니까 계속 보고 싶더라. 다른 엄마들이 나한테 막 물어보는 것도 있고. 하하하.”
마지막 이유는 나 때문이다. 아내는 올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부모 모임(PTA)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고, 셋째와 넷째가 초등학생이라 두 개의 PTA 전부 다 참여하는데 이 학부모 모임이 끝나면 엄마들끼리 차도 한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의 8할 이상이 한국드라마와 케이팝 등 한국문화에 관한 것들이며 당연히 한국인 남편을 둔 아내에게 숱한 질문이 쏟아진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얼마전에 있었던 동네 학부모들 바베큐 파티에 참석했을 때 온갖 질문을 받았다. 그런 상황을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경험하다보니 아내도 그냥 한번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화제작들을 모조리 섭렵하게 된 것이다.
일본과 다른 한국드라마 여성 캐릭터
▲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손예진 스틸컷(이미지 출처 : tvN)
그런데 아내의 각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듣다 보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된다. 그는 지금 한국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 캐릭터들의 독립성과 진취성, 자주적 태도 등을, 일본드라마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한다. 이는 바베큐 파티에서 만난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사랑의 불시착>에 등장하는 윤세리(손예진 분)가 자수성가한 CEO이고 북한으로 넘어간 후에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태도에 상당한 충격과 신선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설정에 착목한 논문들도 많이 등장했다. 일본근대문학연구자 하세가와 케이는 ‘한류와 페미니즘’, ‘한류 서브컬쳐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2006년 이후 여러 서적과 논문을 펴냈다. 그는 “2000년대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한국사회의 변화와 정확히 일치한다”며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여권 신장의 움직임에 컨텐츠 창작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또한 하세가와는 시청자층 변화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겨울연가>의 주요 시청자들은 어머니 세대였고 그들의 감상평은 “마치 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다”라는 자기투영적 의미가 강했다. 즉 드라마 자체의 완결성 보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유지했던 2003년 당시 일본사회에서 50대 이상의 어머니 세대가 잊고 있었던 첫사랑을 떠올리는 기제로서 <겨울연가>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주 시청자층, 한국 잘아는 20-30대로 확장
하지만 최근의 한국드라마는 시청자 층이 20-30대로 확장되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단 드라마 속 여성이 스스로를 중요시한다. 이유없이 이성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종속적 캐릭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프라이드에 기반한 독립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 그들에게는 ‘멋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음식, 미용, 케이팝 등을 통해 한국문화 자체에 적응된 이들이 늘어나 한국드라마 역시 그 카테고리 범위 내로 생각하기 때문에 심리적 허들(hurdle)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점이다. 영화평론가 마에다 유이치 씨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원래 한국드라마 보는 사람들은 계속 보니까 논외로 치더라도 최근에는 20-30대 여성들이 새로운 주 타겟층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들은 한국을 매우 잘 알아요. 한국여행 안 다녀온 사람이 없고, 주말이 되면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을 다녀가면서 인스타그램에 경쟁하듯 올리니까요.”
이들이 유입되면서 세대별 대립도 무의미해졌다. <겨울연가>가 유행했을 때 한국드라마에 빠져 사는 중노년 세대를 바보스럽게 쳐다보던 시선이 존재했는데, 지금은 그 중노년 엄마가 <이태원클라스>를 좋아하는 30-40대 딸과 그 손녀를 데리고 함께 오쿠보 한류투어를 하고 있다. 내 주위만 둘러봐도 10대 초반 딸 덕분에 케이팝에 입문하는 엄마들이 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한국드라마를 통해 한국문화를 다른 문화, 즉 이문화(異文化)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녀가 같이 트와이스, 블랙핑크, BTS 등의 케이팝을 듣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최악 한일관계 극복 동력, ‘꾸준함’과 ‘멋짐’
▲ 신오쿠보 코리아 타운에 북적거리는 젊은 일본인들(이미지 출처 : 이현석)
그런데 왜 한국문화가 이렇게까지 정착할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지금 한일관계는 전후 최악으로 묘사될 정도로 엉망인데 말이다. 나는 그 결정적 이유가 ‘꾸준함’과 ‘멋짐’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문화(異文化)가 다른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소개-붐-주류문화의 인정-대중적 확산-정착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누군가가 소개해서 한바탕 붐을 일으키고 그것을 기존문화가 인정한 후 대중적 확산을 오래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정착된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경우 대중문화 업계에서는 이미 재일동포라는 사회적 기반이 있었다. <겨울연가> 붐이 불기 이전에도 한국문화는 조용필, 김연자, 계은숙 등의 가수들이 재일동포 기획사의 소개 등을 통하는 방식으로 알음알음으로 진출해 있었다. 이들의 성과가 개인적인 것이라 치부하면 논의는 거기서 끝나지만, 실제 <겨울연가>가 사회적 현상을 불러일으켰을 때 일본 매스컴들은 한류문화를 논하면서 조용필, 계은숙 등을 선구자적 위치에 놓기도 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일본사회에서의 한국문화는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물경 6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겨울연가> 붐이 꺼지고 난 다음도 비슷하다. 보통의 사회라면 붐이 꺼지면 일거에 그 열기가 식기 마련인데, 한국드라마는 일본 공중파 방송에 계속 방영된다. 편당 계약이 저렴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균 3%에 달하는 고정시청율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속칭 ‘히루도라와 칸도라’(낮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라는 속어까지 나올 정도로 각 민영지상파 방송국들과 NHK 위성방송은 경쟁적으로 한국드라마를 편성했고 십수년을 그렇게 해 왔다.
▲ 신오쿠보 코리아 타운에 북적거리는 젊은 일본인들(이미지 출처 : 이현석)
그리고 부대적인 요소로서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을 빼놓을 수 없다.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이 음식점 위주라면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은 한국스타일의 미용, 연예, 음식, 피시방, 노래방, 클럽 등등을 그대로 재현한 동네를 만들어냈다. 드라마나 잡지에서나 보던 이문화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거리, 스페인 언덕, 롯본기 등은 말만 그렇지 실제로 가면 그냥 음식점 몇 개 있거나, 클럽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총체적이며 지속적인 꾸준함은 한국문화의 정착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두 번째로 ‘각꼬이이(かっこいい, 멋짐)’이다. 젊은 층, 이를테면 10-30대 특히 여성들은 한국문화를 멋짐의 대명사로 받아들인다. 한국친구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멋지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의 경우 아빠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친구들이 부럽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고 한다.
▲ 둘째 딸 방 한쪽 벽면에 장식된 트와이스의 포스터들. 그는 트와이스의 정연을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다고 말한다.(이미지 출처 : 박철현)
이 멋짐의 정의는 쉽게 내릴 수가 없다. 다만 트위터 등을 보면 트와이스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듣고 우울증이 나앗다라던가, BTS의 노랫말을 인용하며 ‘내 자신을 소중히 해야겠다’ ‘자살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하는 멘션이 차고 넘친다. 앞에서 말한 <사랑의 불시착> 속 윤세리의 캐릭터도 멋짐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사실 일본의 여성 아이돌의 노래나 드라마 속의 여성캐릭터 묘사는 멋짐보다는 귀여움에 가깝다. 종속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건 일본사회에서의 여성은 ‘기레이(綺麗, 예쁘다)’보다 ‘가와이이(可愛い, 귀엽다)’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도 설명된다. 여자는 남자들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일본사회의 오래된 습속을 ‘멋짐’을 내세운 한국문화가 깨부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과 ‘나는 나대로 살고 싶다’의 일본어 번역판이 각각 20만부를 뛰어넘는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국 남자라고 모두 공유, 현빈은 아닌데...
▲ 드라마 <도깨비> 공유 스틸컷(이미지 출처 : tvN)
당당함과 멋짐의 선구자로 한국문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문화를 누구보다 잘 알아버린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더이상 ‘귀여움’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한국문화가 일본사회에 던진 긍정적인 영향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하나의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공유, 현빈, 김수현을 거론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내와 아내의 친구들의 어색한 눈빛은... ... 이제 그만 보고 싶다.
박철현 사업가,작가.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척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후 2020년 현재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일기일회’, 한국일보에 ‘신일본 신인류’를 연재했고, 지금은 서울신문에 ‘이방사회’, 오마이뉴스에 ‘도쿄스캔들’을 연재중이다. 아내와의 결혼 과정을 그린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네 아이의 육아 과정을 담은 <어른은 어떻게 돼>, 삶과 일의 경험담의 <이렇게 살아도 돼> 등의 에세이를 거쳐 최근 소설 <화이트리스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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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5&cid=2367410 <못보던 멋진 모습을 꾸준히... 활짝 열린 일본 안방>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10-30대 특히 여성들은 한국문화를 멋짐의 대명사로 받아들인다. 한국친구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멋지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의 경우 아빠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친구들이 부럽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고 한다. (중략) 트위터 등을 보면 트와이스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듣고 우울증이 나앗다라던가, BTS의 노랫말을 인용하며 ‘내 자신을 소중히 해야겠다’ ‘자살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하는 멘션이 차고... ...
갑자기 한국드라마에 빠진 일본인 아내
▲ 드라마 <도깨비> 일본판 홍보 포스터
“도깨비 다 봤어. 이제 <이태원클라스> 볼 건데 이건 꼭 같이 보자.”
결혼한지 19년째에 접어드는 동갑내기 일본인 아내는 요즘 한국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2003년 제1차 한류붐이 불었을 때도, 동방신기나 소녀시대가 등장했던 제2차 한류붐 때도 전혀 한국문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사랑의 불시착>, <도깨비>, <별에서 온 그대>를 봤다. 이 세 작품, 나는 이미 본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아직 못 본 <이태원클라스>만큼은 같이 보자고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다. 19년 동안 한국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궁금하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 일단 시온이(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시간이 생긴 게 가장 크고, 요즘엔 취미생활이 넷플릭스 밖에 없어. 코로나 때문에 수예부도 올스톱이고 마쓰리(동네축제)도 다 중지니까. 넷플릭스 들어가면 한국드라마를 그렇게 추천해대는데 어디 안 볼 수가 있어야지. 근데 또 한번 보니까 엄청 재미나더라고. 예전 <겨울연가> 같은 그런 닭살 돋는 느낌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고 하나 다 보고 나니까 계속 보고 싶더라. 다른 엄마들이 나한테 막 물어보는 것도 있고. 하하하.”
마지막 이유는 나 때문이다. 아내는 올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부모 모임(PTA)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고, 셋째와 넷째가 초등학생이라 두 개의 PTA 전부 다 참여하는데 이 학부모 모임이 끝나면 엄마들끼리 차도 한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의 8할 이상이 한국드라마와 케이팝 등 한국문화에 관한 것들이며 당연히 한국인 남편을 둔 아내에게 숱한 질문이 쏟아진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얼마전에 있었던 동네 학부모들 바베큐 파티에 참석했을 때 온갖 질문을 받았다. 그런 상황을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경험하다보니 아내도 그냥 한번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화제작들을 모조리 섭렵하게 된 것이다.
일본과 다른 한국드라마 여성 캐릭터
▲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손예진 스틸컷(이미지 출처 : tvN)
그런데 아내의 각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듣다 보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된다. 그는 지금 한국드라마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 캐릭터들의 독립성과 진취성, 자주적 태도 등을, 일본드라마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한다. 이는 바베큐 파티에서 만난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사랑의 불시착>에 등장하는 윤세리(손예진 분)가 자수성가한 CEO이고 북한으로 넘어간 후에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태도에 상당한 충격과 신선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설정에 착목한 논문들도 많이 등장했다. 일본근대문학연구자 하세가와 케이는 ‘한류와 페미니즘’, ‘한류 서브컬쳐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2006년 이후 여러 서적과 논문을 펴냈다. 그는 “2000년대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한국사회의 변화와 정확히 일치한다”며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여권 신장의 움직임에 컨텐츠 창작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또한 하세가와는 시청자층 변화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겨울연가>의 주요 시청자들은 어머니 세대였고 그들의 감상평은 “마치 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다”라는 자기투영적 의미가 강했다. 즉 드라마 자체의 완결성 보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유지했던 2003년 당시 일본사회에서 50대 이상의 어머니 세대가 잊고 있었던 첫사랑을 떠올리는 기제로서 <겨울연가>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주 시청자층, 한국 잘아는 20-30대로 확장
하지만 최근의 한국드라마는 시청자 층이 20-30대로 확장되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단 드라마 속 여성이 스스로를 중요시한다. 이유없이 이성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종속적 캐릭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프라이드에 기반한 독립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 그들에게는 ‘멋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음식, 미용, 케이팝 등을 통해 한국문화 자체에 적응된 이들이 늘어나 한국드라마 역시 그 카테고리 범위 내로 생각하기 때문에 심리적 허들(hurdle)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점이다. 영화평론가 마에다 유이치 씨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원래 한국드라마 보는 사람들은 계속 보니까 논외로 치더라도 최근에는 20-30대 여성들이 새로운 주 타겟층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들은 한국을 매우 잘 알아요. 한국여행 안 다녀온 사람이 없고, 주말이 되면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을 다녀가면서 인스타그램에 경쟁하듯 올리니까요.”
이들이 유입되면서 세대별 대립도 무의미해졌다. <겨울연가>가 유행했을 때 한국드라마에 빠져 사는 중노년 세대를 바보스럽게 쳐다보던 시선이 존재했는데, 지금은 그 중노년 엄마가 <이태원클라스>를 좋아하는 30-40대 딸과 그 손녀를 데리고 함께 오쿠보 한류투어를 하고 있다. 내 주위만 둘러봐도 10대 초반 딸 덕분에 케이팝에 입문하는 엄마들이 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한국드라마를 통해 한국문화를 다른 문화, 즉 이문화(異文化)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녀가 같이 트와이스, 블랙핑크, BTS 등의 케이팝을 듣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최악 한일관계 극복 동력, ‘꾸준함’과 ‘멋짐’
▲ 신오쿠보 코리아 타운에 북적거리는 젊은 일본인들(이미지 출처 : 이현석)
그런데 왜 한국문화가 이렇게까지 정착할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지금 한일관계는 전후 최악으로 묘사될 정도로 엉망인데 말이다. 나는 그 결정적 이유가 ‘꾸준함’과 ‘멋짐’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문화(異文化)가 다른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소개-붐-주류문화의 인정-대중적 확산-정착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누군가가 소개해서 한바탕 붐을 일으키고 그것을 기존문화가 인정한 후 대중적 확산을 오래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정착된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경우 대중문화 업계에서는 이미 재일동포라는 사회적 기반이 있었다. <겨울연가> 붐이 불기 이전에도 한국문화는 조용필, 김연자, 계은숙 등의 가수들이 재일동포 기획사의 소개 등을 통하는 방식으로 알음알음으로 진출해 있었다. 이들의 성과가 개인적인 것이라 치부하면 논의는 거기서 끝나지만, 실제 <겨울연가>가 사회적 현상을 불러일으켰을 때 일본 매스컴들은 한류문화를 논하면서 조용필, 계은숙 등을 선구자적 위치에 놓기도 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일본사회에서의 한국문화는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물경 6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겨울연가> 붐이 꺼지고 난 다음도 비슷하다. 보통의 사회라면 붐이 꺼지면 일거에 그 열기가 식기 마련인데, 한국드라마는 일본 공중파 방송에 계속 방영된다. 편당 계약이 저렴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균 3%에 달하는 고정시청율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속칭 ‘히루도라와 칸도라’(낮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라는 속어까지 나올 정도로 각 민영지상파 방송국들과 NHK 위성방송은 경쟁적으로 한국드라마를 편성했고 십수년을 그렇게 해 왔다.
▲ 신오쿠보 코리아 타운에 북적거리는 젊은 일본인들(이미지 출처 : 이현석)
그리고 부대적인 요소로서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을 빼놓을 수 없다.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이 음식점 위주라면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은 한국스타일의 미용, 연예, 음식, 피시방, 노래방, 클럽 등등을 그대로 재현한 동네를 만들어냈다. 드라마나 잡지에서나 보던 이문화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거리, 스페인 언덕, 롯본기 등은 말만 그렇지 실제로 가면 그냥 음식점 몇 개 있거나, 클럽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총체적이며 지속적인 꾸준함은 한국문화의 정착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두 번째로 ‘각꼬이이(かっこいい, 멋짐)’이다. 젊은 층, 이를테면 10-30대 특히 여성들은 한국문화를 멋짐의 대명사로 받아들인다. 한국친구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멋지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의 경우 아빠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친구들이 부럽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고 한다.
▲ 둘째 딸 방 한쪽 벽면에 장식된 트와이스의 포스터들. 그는 트와이스의 정연을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다고 말한다.(이미지 출처 : 박철현)
이 멋짐의 정의는 쉽게 내릴 수가 없다. 다만 트위터 등을 보면 트와이스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듣고 우울증이 나앗다라던가, BTS의 노랫말을 인용하며 ‘내 자신을 소중히 해야겠다’ ‘자살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하는 멘션이 차고 넘친다. 앞에서 말한 <사랑의 불시착> 속 윤세리의 캐릭터도 멋짐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사실 일본의 여성 아이돌의 노래나 드라마 속의 여성캐릭터 묘사는 멋짐보다는 귀여움에 가깝다. 종속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건 일본사회에서의 여성은 ‘기레이(綺麗, 예쁘다)’보다 ‘가와이이(可愛い, 귀엽다)’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도 설명된다. 여자는 남자들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일본사회의 오래된 습속을 ‘멋짐’을 내세운 한국문화가 깨부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과 ‘나는 나대로 살고 싶다’의 일본어 번역판이 각각 20만부를 뛰어넘는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국 남자라고 모두 공유, 현빈은 아닌데...
▲ 드라마 <도깨비> 공유 스틸컷(이미지 출처 : tvN)
당당함과 멋짐의 선구자로 한국문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문화를 누구보다 잘 알아버린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더이상 ‘귀여움’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한국문화가 일본사회에 던진 긍정적인 영향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하나의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공유, 현빈, 김수현을 거론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내와 아내의 친구들의 어색한 눈빛은... ... 이제 그만 보고 싶다.
박철현
사업가,작가.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척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후 2020년 현재 인테리어 업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일기일회’, 한국일보에 ‘신일본 신인류’를 연재했고, 지금은 서울신문에 ‘이방사회’, 오마이뉴스에 ‘도쿄스캔들’을 연재중이다. 아내와의 결혼 과정을 그린 <일본 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 네 아이의 육아 과정을 담은 <어른은 어떻게 돼>, 삶과 일의 경험담의 <이렇게 살아도 돼> 등의 에세이를 거쳐 최근 소설 <화이트리스트>를 썼다.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5&cid=2367410 <못보던 멋진 모습을 꾸준히... 활짝 열린 일본 안방>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