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수육은 ‘찍먹’이어야 맛있다고 주장하면, 무슨 말이냐며 ‘부먹’파가 펄쩍 뜁니다. 누가 옳은 걸까요? 장미를 두고 아름답다고 해도, ‘난 장미 정말 별로야’라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도 있지요. 신(神)은 존재할까요? 아마도 화해하기 힘든 격론이 벌어질 겁니다. 이런 경우, 누가 옳은 걸까요?
사람 눈엔 코끼리가, 코끼리 눈엔 공룡이……
크기가 대략 7.5m에 6.3t의 무게인 아프리카코끼리
동물원에 가면 참 신기합니다. 목이 기다란 기린에, 얼룩무늬의 말, 코뿔소, 하마, 악어,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렸을 적부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코끼리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어떻게 저렇게 코가 길게 뻗어 나올 수 있는 건지, 참 신기했습니다. 아프리카코끼리는 크기가 대략 7.5m에 6.3t의 무게가 나간다고 합니다. 엄청나지요?
그런데 코끼리는 정말 큰 동물일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어린 내 눈에 그렇게 보인 것뿐입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주 먼 옛날 살던 아르헨티노사우루스란 놈은 코끼리보다 5배나 크고, 열 배나 무거웠다고 합니다. 그 공룡이 코끼리를 본다면, ‘고놈 참 귀엽게 생겼네’라고 했겠지요? 그렇다면 코끼리를 크다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나의,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인간을 기준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무엇이 진리냐에 관해서는 많은 경우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누군가 탕수육은 ‘찍먹’이어야 맛있다고 주장하면, 무슨 말이냐며 ‘부먹’파가 펄쩍 뜁니다. 누가 옳은 걸까요? 장미를 두고 아름답다고 해도, ‘난 장미 정말 별로야’라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도 있지요. 신(神)은 존재할까요? 아마도 화해하기 힘든 격론이 벌어질 겁니다. 이런 경우, 누가 옳은 걸까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맛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람이 척도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뭇단 짐꾼 출신 철학자, 자신만의 길을 떠나다
나뭇단 짐꾼 출신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 트라케 지방의 압데라에서 기원전 490년께에 태어난 프로타고라스입니다. 압데라는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380년)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프로타고라스는 짐꾼이었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데모크리토스가 나뭇단을 지게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프로타고라스를 보았답니다. 나뭇단을 정리하는 솜씨에 눈길을 빼앗긴 데모크리토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말했지요. “그 나뭇단을 버리고, 대신 글을 읽고 쓰는 일을 배워 이 세상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프로타고라스는 아무 미련 없이 나뭇단을 길거리에 내팽개쳐두고 데모크리토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와 공부를 시작한 프로타고라스는 얼마 후, 나뭇단을 버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데모크리토스를 떠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가 데모크리토스를 떠난 이유가 뭘까요?
그런데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상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여전히 회자되는 데에는 그 안에 담긴 철학사적 의미 때문일 겁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서는 두 사람 사이를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399년)입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분류되는 반면,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자로 분류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로부터 불러 내렸고, 도시에다 가져다 놓았으며, 집안으로까지 들여놓았다. 그는 삶과 관습, 좋은 것과 나쁜 것, 즉 선과 악에 관하여 탐구하게 만들었다.”
홀딱 빠진 소크라테스 “내가 본 가장 지혜로운 사람”
처음으로 사람에게 관심을 돌린 철학자 소크라테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 큰 전환점을 이루었는데, 철학자들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놓았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모두 “이 세상은 어떻게,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들을 “자연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만물의 근본은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부터 원자라고 했던 데모크리토스까지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근본 요소와 원리에 대한 진리를 추구했지요. 하지만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 진리일까요?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는 물일까요, 공기일까요, 불일까요? 거기에 흙도 들어가나요? 숫자라고요? 씨앗이요? 원자라고요? 과연 누가 옳은 말을 한 것일까요? 이들의 주장을 살펴본 프로타고라스의 대답은 이러했을 겁니다. “각자가 각자의 척도에 따라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한 것일 뿐, 객관적인 진리를 누가 알겠어?” 그렇다면 그는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자였을까요?
아무튼 그의 지혜는 그리스 전역에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그를 아테네로 불러 조언을 구했습니다. 기원전 444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투리오이 시를 건설한 다음 그곳에 맞는 법을 제정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아테네에 머물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프로타고라스』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50대 중반의 프로타고라스와 30대 중반의 소크라테스가 만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작품의 첫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플라톤의 책 『프로타고라스』(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친구가 소크라테스에게 묻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건가? 또 젊은 알키비아데스를 쫓아다니다 온 거지?” 알키비아데스는 꽃미남으로 소문난 아테네의 명문가의 청년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매우 애정(!)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대답합니다. “그 녀석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어!” 친구는 깜짝 놀랐지요. “아니 세상에,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나?”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아테네 사람이 아니야. 압데라 출신이래. 바로 프로타고라스! 가장 지혜로운 것이 어떻게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프로타고라스 님이야말로 요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지.”
작품 속에서는 조금 전에 프로타고라스를 만나고 온 소크라테스가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그의 지성미에 홀딱 빠진 모양입니다.
절대 진리 부인, 독선 경계“내게 배울 건 숙고뿐”
“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잘 숙고하는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라 불렸는데, 우리는 흔히 ‘궤변론자’라고 옮기지만, 그 말 자체는 ‘지혜로운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어떤 지혜에 매료된 것일까요?
“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잘 숙고하는 것입니다. 집안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자기 집안을 가장 잘 꾸려나갈 것인지, 또 나랏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나랏일들을 가장 능력 있게 행하고 논할 것인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솔깃할 말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지혜이니 말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를 고민하며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과는 결이 다른 철학을 했던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사람이 척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절실한 지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과는 달리, 우리의 삶의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나 절대적인 가치 판단의 척도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려 듭니다. 도덕과 윤리, 정치와 미학의 문제에서도 말입니다. 자칫 강퍅한 독선이 될 수 있어 위험하지요. 서로 자신이 옳다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갈등이 깊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짜장이냐, 짬뽕이냐는 누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인데 말이지요. 거짓과 부정은 경계하고 거부해야겠지만, 우리가 프로타고라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김헌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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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cid=2367823 <8. “사람이 만물의 척도다”>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탕수육은 ‘찍먹’이어야 맛있다고 주장하면, 무슨 말이냐며 ‘부먹’파가 펄쩍 뜁니다. 누가 옳은 걸까요? 장미를 두고 아름답다고 해도, ‘난 장미 정말 별로야’라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도 있지요. 신(神)은 존재할까요? 아마도 화해하기 힘든 격론이 벌어질 겁니다. 이런 경우, 누가 옳은 걸까요?
사람 눈엔 코끼리가, 코끼리 눈엔 공룡이……
크기가 대략 7.5m에 6.3t의 무게인 아프리카코끼리
동물원에 가면 참 신기합니다. 목이 기다란 기린에, 얼룩무늬의 말, 코뿔소, 하마, 악어,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렸을 적부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코끼리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어떻게 저렇게 코가 길게 뻗어 나올 수 있는 건지, 참 신기했습니다. 아프리카코끼리는 크기가 대략 7.5m에 6.3t의 무게가 나간다고 합니다. 엄청나지요?
그런데 코끼리는 정말 큰 동물일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어린 내 눈에 그렇게 보인 것뿐입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주 먼 옛날 살던 아르헨티노사우루스란 놈은 코끼리보다 5배나 크고, 열 배나 무거웠다고 합니다. 그 공룡이 코끼리를 본다면, ‘고놈 참 귀엽게 생겼네’라고 했겠지요? 그렇다면 코끼리를 크다고 말한 건 어디까지나 나의,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인간을 기준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무엇이 진리냐에 관해서는 많은 경우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누군가 탕수육은 ‘찍먹’이어야 맛있다고 주장하면, 무슨 말이냐며 ‘부먹’파가 펄쩍 뜁니다. 누가 옳은 걸까요? 장미를 두고 아름답다고 해도, ‘난 장미 정말 별로야’라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도 있지요. 신(神)은 존재할까요? 아마도 화해하기 힘든 격론이 벌어질 겁니다. 이런 경우, 누가 옳은 걸까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맛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람이 척도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뭇단 짐꾼 출신 철학자, 자신만의 길을 떠나다
나뭇단 짐꾼 출신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 트라케 지방의 압데라에서 기원전 490년께에 태어난 프로타고라스입니다. 압데라는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380년)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프로타고라스는 짐꾼이었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데모크리토스가 나뭇단을 지게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프로타고라스를 보았답니다. 나뭇단을 정리하는 솜씨에 눈길을 빼앗긴 데모크리토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말했지요. “그 나뭇단을 버리고, 대신 글을 읽고 쓰는 일을 배워 이 세상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프로타고라스는 아무 미련 없이 나뭇단을 길거리에 내팽개쳐두고 데모크리토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와 공부를 시작한 프로타고라스는 얼마 후, 나뭇단을 버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데모크리토스를 떠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가 데모크리토스를 떠난 이유가 뭘까요?
그런데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상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여전히 회자되는 데에는 그 안에 담긴 철학사적 의미 때문일 겁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서는 두 사람 사이를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399년)입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분류되는 반면,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자로 분류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로부터 불러 내렸고, 도시에다 가져다 놓았으며, 집안으로까지 들여놓았다. 그는 삶과 관습, 좋은 것과 나쁜 것, 즉 선과 악에 관하여 탐구하게 만들었다.”
홀딱 빠진 소크라테스 “내가 본 가장 지혜로운 사람”
처음으로 사람에게 관심을 돌린 철학자 소크라테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 큰 전환점을 이루었는데, 철학자들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놓았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모두 “이 세상은 어떻게,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들을 “자연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만물의 근본은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부터 원자라고 했던 데모크리토스까지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근본 요소와 원리에 대한 진리를 추구했지요. 하지만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 진리일까요?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는 물일까요, 공기일까요, 불일까요? 거기에 흙도 들어가나요? 숫자라고요? 씨앗이요? 원자라고요? 과연 누가 옳은 말을 한 것일까요? 이들의 주장을 살펴본 프로타고라스의 대답은 이러했을 겁니다. “각자가 각자의 척도에 따라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한 것일 뿐, 객관적인 진리를 누가 알겠어?” 그렇다면 그는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자였을까요?
아무튼 그의 지혜는 그리스 전역에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그를 아테네로 불러 조언을 구했습니다. 기원전 444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투리오이 시를 건설한 다음 그곳에 맞는 법을 제정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아테네에 머물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프로타고라스』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50대 중반의 프로타고라스와 30대 중반의 소크라테스가 만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작품의 첫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플라톤의 책 『프로타고라스』(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친구가 소크라테스에게 묻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건가? 또 젊은 알키비아데스를 쫓아다니다 온 거지?” 알키비아데스는 꽃미남으로 소문난 아테네의 명문가의 청년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매우 애정(!)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대답합니다. “그 녀석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어!” 친구는 깜짝 놀랐지요. “아니 세상에,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나?”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아테네 사람이 아니야. 압데라 출신이래. 바로 프로타고라스! 가장 지혜로운 것이 어떻게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프로타고라스 님이야말로 요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지.”
작품 속에서는 조금 전에 프로타고라스를 만나고 온 소크라테스가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그의 지성미에 홀딱 빠진 모양입니다.
절대 진리 부인, 독선 경계“내게 배울 건 숙고뿐”
“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잘 숙고하는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라 불렸는데, 우리는 흔히 ‘궤변론자’라고 옮기지만, 그 말 자체는 ‘지혜로운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어떤 지혜에 매료된 것일까요?
“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잘 숙고하는 것입니다. 집안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자기 집안을 가장 잘 꾸려나갈 것인지, 또 나랏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나랏일들을 가장 능력 있게 행하고 논할 것인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솔깃할 말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지혜이니 말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를 고민하며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과는 결이 다른 철학을 했던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사람이 척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절실한 지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과는 달리, 우리의 삶의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나 절대적인 가치 판단의 척도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려 듭니다. 도덕과 윤리, 정치와 미학의 문제에서도 말입니다. 자칫 강퍅한 독선이 될 수 있어 위험하지요. 서로 자신이 옳다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갈등이 깊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짜장이냐, 짬뽕이냐는 누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인데 말이지요. 거짓과 부정은 경계하고 거부해야겠지만, 우리가 프로타고라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김헌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cid=2367823 <8. “사람이 만물의 척도다”>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