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인문 플랫폼 인문360과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역사[인류]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의 본능

2022-08-01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의 본능
  

2017년 10월, 사상 초유의 황금연휴가 현실화되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놀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긴 휴가를 거의 가져본 적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가 계획을 어떻게 짜야 할지 모르겠다’며 또 하나의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놀이도 일처럼 고민하는 우리 현대인들은 ‘놀이’에 대한 죄책감을 내면화해왔다. 놀 수 있을 때 노는 것도 왠지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는 이들이 많다. 또 놀이의 진정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못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일곱 살의 어느 오후 ‘사당오락’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후부터 더 이상 놀이가 즐겁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다. ‘4시간 자면 대학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속설이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말이 일곱 살 소녀의 귀에 들어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엄마의 입에서 나온 것이 문제였다. 엄마를 한참 무서워하던 시절이었던 터라 ‘앞으로 잠을 줄여 대학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던 것도 같다. 이후 나는 잠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었고, 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갔다. 이렇게 놀이에 대한 최초의 거부감을 학습한 시기가 다를 뿐, 우리 모두는 놀이에 대한 죄책감을 어떤 식으로든 내면화해온 것이 아닐까.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조언은 참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벌까지 주면서, ‘놀 땐 놀라’니. 그래서 우리들은 ‘사실은 몰래 몰래 곧잘 놀면서도, 놀 때마다 공부나 일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집단적 분열증상을 앓게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인간의 정의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파베르, 호모 사피엔스 등은 모두 이해되었지만, 호모 루덴스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놀고 있는 동안에도 불안과 권태를 느끼는 나 자신을 보면, 놀이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세 명의 조카가 차례차례 태어나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호모 루덴스의 정의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아기들은 본능적으로 놀이의 대상을 찾았다. 아기들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를 지닌 장난감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들을 가뿐히 들어올린 채 비행기를 태워준다. 그때마다 조카들은 나를 ‘인간 비행기’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조카들에게 ‘온몸으로 비행기를 태워주는 사람’ ‘장난감이나 간식을 사주는 사람’ ‘가위바위보를 곧잘 져주는 사람’ ‘엉터리 레슬링이나 달리기 시합을 함께 해주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조카들에게 ‘살아있는 장난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살아 숨쉬는 장난감, 놀이의 대상이자 놀이터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보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놀이는 인간이 지닌 최고로 아름다운 본능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색깔도, 향기도, 소리도, 맛도. 모두 놀이를 통하여 더욱 선명하고 다채롭게 배울 수 있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세상과 관계를 맺고, 놀이를 통해 사랑과 인내와 슬픔과 감동을 배운다. 나도 한때는 그랬을 것이다. 놀이에 대한 죄책감 없이 놀이 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해맑은 감수성이, 한때는 나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그 해맑은 감수성을 되찾는 것이 현대인의 새로운 과제임을 느낀다. 황금연휴에 꼭 멀리 외국으로 휴가를 떠나지 않아도 좋다. 여가를 즐긴다고 해서 꼭 레포츠나 취미활동에 돈을 쓰지 않아도 좋다. 놀이는 누가 뭐래도 행복한 것이며, 우리 몸과 마음에 기쁨을 충전하는 길임을 긍정하기만 한다면.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나이 들수록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글을 쓴답시고 그렇게 많은 여행을 떠났던 것도 사실은 글쓰기라는 노동을 핑계로 여행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놀이’를 죄책감 없이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과 휴식을 분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놀이 속에도 일의 요소가 있고 일 속에도 놀이의 요소가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는 것은 중요하다. 노동 속에서도 놀이의 기쁨을 찾을 줄 알고, 놀이 속에서도 배움이나 일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면 꼭 일과 휴식을 칼날처럼 구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어른들은 놀이의 기쁨을 자발적으로 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만은 놀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꼭 마련해주면 좋겠다. 어렸을 때 놀이의 기쁨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커서도 놀이의 진정한 희열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주눅들지 않는 교육, 아이들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교육, 결코 등수를 따지지 않는 교육으로 유명한 핀란드 아이들 방학 숙제는 ‘집 바깥에서 노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어릴 때는 놀이를 곧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창구로 만드는 것. 놀이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배우는 어린 시절의 체험이야말로 ‘호모 루덴스’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결정적인 통로가 된다.

모든 진정한 의례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이하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했다. 현대인들은 의례와 신성한 놀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문명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정교해졌다. 하지만 음악적 감성은 여전히 그런 감각을 되살려 준다. 우리는 음악의 분위기를 타는 순간 의례를 느끼게 된다. 음악을 즐기면서, 그것이 종교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든 아니든 아름다움의 감각과 성스러움에 대한 느낌이 하나로 합쳐지고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사라져서 하나로 융합된다.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중에서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쓴 학자 마샬 맥루한은 놀이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놀이가 없는 사회나 인간은 좀비 상태로 침몰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놀이’의 정신이야말로 인류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라고 믿었다.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놀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조건이다.” 놀이를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놀이 속에서 인간의 창조적 본질을 찾을 줄 알았던 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놀이를 할 때 우리는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이게 과연 내 인생의 발전에 도움이 될까’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냥 놀이의 바다에 풍덩 빠지는 것이다. 놀이의 기쁨에 온몸을 맡기느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도 모를 정도로, 놀이는 망아(忘我)의 쾌락을 선물한다. 놀이의 기쁨에 마음을 빼앗겨 ‘나는 누구인가’를 잊어버리는 경지, 나아가 마침내 놀이를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 호모 루덴스의 행복이 아닐까. 노동의 효율성 속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던져버리는 현대인,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달콤한 휴가마저 반납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놀이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놀이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놀이는 노동의 회피도 아니다. 놀이는 세계와 나 자신이 관계 맺는 원초적인 기쁨을 찾아가는 마음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부디 죄책감 없이 놀이에 집중할 수 있는 해맑은 순수를 되찾을 수 있기를. 놀이를 통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투명한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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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