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기표, 최기표가 거두절미 무섭다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떠나는 것으로 단편 소설 「우상의 눈물」은 끝난다.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학교 폭력의 주동자인 문제아 기표가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집을 나갔다는 것인가…….
작가들, 그렇고 그런 뻔한 일에는 눈길조차
작가
작가는 상상, 그 능력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독자를 꾀는 그 내숭의 작의라든가 그 이야기 속에 괴물을 등장시켜 세속의 모범 인생들을 엿 먹이는 일 등 작가는 분명 이제까지의 제대로 된 상태를 부정하거나 아예 딴판 세상을 펼쳐 보이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상상 에너지로 충전된 이 로맨티시스트들은 그 식성부터가 까다롭다. 잘 차려진 진수성찬은 물론 늘 보는 그렇고 그런 밥상 따위는 눈길도 안 준다. 널려 있는 것, 그렇고 그런 뻔한 것은 결코 자기가 찾는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투정한다. 그들은 항상 허기진 눈으로 여기가 아닌 거기, 이것이 아닌 저것인,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대학 다닐 때 읽은 최재서(영문학자 겸 문학평론가, 1908-1964)의 『문학원론』 속 콜리지(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 1872-1834)의 천재론을 기억하고 있다. 문학은 개성의 표현, 문학이 하나의 예술일진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그 무엇을 가져야 한다,는 예술의 원천적 가치가 개성에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바로 특이한 그 무엇에 집착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야말로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아름다움을 찾는 독창성, 즉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로 드러난다. 그러할 때 독자들은 소설 읽기 몰입의 경지에서 작가의 그 상상력을 천재성으로 읽는다.
거짓말에 담긴 개연적 진실, 작가의 신명
아무튼 소설은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거짓말 이야기다. 거짓말, 뭔가를 믿게 하기 위한 서사 구조의 생태적 전략이다.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을 수 있는, 누구도 못 본 것을 봤다는데 믿지를 않으니 어쩌랴, 거짓말이라도 보태 그것을 믿게 할 수밖에.
그렇게 허구의 개연적 진실을 역설하는 작가의 그 자부가 글쓰기의 신명으로 이어진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곧 보이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그렇고 그런 현실, 기존의 그 인식을 부정하거나 아예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 더 값진 가치, 더 좋은 의미를 자신이 하는 거짓말 이야기 속에 넌지시 비추기 위한 능청과 시치미 떼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다.
그리하여 작가가 그려내는 그 낯선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엉뚱 생뚱맞고 때로 난해하여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슬픔이 그냥 슬픔이 아니고 분노의 디테일 또한 자못 섬뜩하다. 지금까지 별것 아닌 것이 이처럼 심각하다는 데 이르러 독자들은 손에 땀까지 밴다. 새롭고 신비한 것을 보는 당신들의 그 긴장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바람이 먹힌 것이다.
궁극적으로 소설은 인물 탐구, 그 캐릭터 만들기에 이르러 작가들의 상상은 절정에 이른다. 만약 인물의 전형성만으로도 가치를 갖는 전대 소설 춘향전을 이 시대의 작가가 다시 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춘향과 이몽룡의 단순 긍정 그 이미지를 변화무쌍의 복잡미묘한 부정형 캐릭터로 바꾸는 일만으로도 어금니에 기쁨의 엔도르핀이 괼 것이다.
괴이쩍고 난해하고 요령부득인 소설 속 인물들
이상 <날개>(이미지 출처 : 알라딘)
“박제가 된 천재를 아느냐?”
이런 첫 문장으로 이상의 소설 「날개」가 펼쳐진다. 몸을 파는 아내의 방에서 고작 화장품 냄새나 즐기는, 자의식 과잉의 정신분열자를 자처하여 위트와 패러독스를 얼굴에 분칠한 채 낄낄거리는 한심한 인간이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내가 비록 박제가 되긴 했어도 나는 여전히 천재이니,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작가 이상의 꿍꿍이셈과 그 뒤에서 짓고 있을 웃음이 보인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작가 이상의 천재성을 담보로 그가 만들어낸 정신분열증 환자를 이상과 동일시하면서, 주인공의, 현실을 떠나 훨훨 날고 싶은 욕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괴이쩍고 난해한, 요령부득의 모호함 속에서 독자들은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와 카프카의 「변신」 속 한 벌레와 『성』 속의 K를 만난다.
이런 류의 불편한 소설과의 만남일수록 독자들은 그 작가를 넘어서는 온갖 오성과 감각을 동원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불편하면 편하게 하기. 그리하여 독자의 상상력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 하나에서도 어떤 낌새를 냄새 맡는다. 『성』의 주인공 이니셜 K와 그의 연인 프리이다에서 어떤 암시를 얻는가 하면 장용학의 『요한 시집』 속 주인공 누혜나 김용성의 『리빠똥 장군』의 리빠똥이라는 낯선 이름 앞에서 긴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민중, 70년대만 해도 내놓고 쓰지 못하던 낱말이다. 그런 시대, 진실의 은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침묵의 눈」이란 다소 섬뜩한 제목의 단편소설에 ‘민중’이란 이름의 등장인물을 등장시켰다가 필화를 입은 적이 있다. 이후 다른 작품에서 민중을 ‘민지웅’으로 슬쩍 감춰 쓰는 즐거움도 괜찮았다.
전상국 <아베의 가족>(이미지 출처 : 알라딘)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작가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돼 방영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MBC 드라마 <아베의 가족>(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중편 소설 『아베의 가족』의 주인공은 백치다. 그 저능아를 아베라고 불렀다. 아베, 백치가 입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 덧붙여 백치가 힘껏 소리 내어 부르는 아베, 아버지의 방언이다. 부권 상실 시대, 제대로 된 아버지가 없어서 생긴 비극을 에둘러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의 아베, 비극의 씨앗이 아닌, 마땅히 찬미받아야 할 성스러운 존재라는 뜻의 아베 마리아의 그 아베.
이쯤에서야 비로소 작가는 ‘아베는 누구인가’, ‘아베는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물음을 독자에게 던질 수 있는 것이다.
학폭 주동자의 가출, 무엇이 무서웠길래
전상국 <우상의 눈물>(이미지 출처 : 알라딘)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기표, 최기표가 거두절미 무섭다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떠나는 것으로 단편 소설 「우상의 눈물」은 끝난다.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학교 폭력의 주동자인 문제아 기표가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집을 나갔다는 것인가. 작가가 마음을 다잡고 남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곧 작가보다 한결 빼어난 상상력을 가진 독자들에 대한 예우이자 기대인 것이다.
“오래전에 발표된 이 작품이 지금도 긴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소설에서 우의1)로 다룬 당대의 비합리적 사회구조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1) 우의 : 寓意,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어느 사회학자가 「우상의 눈물」을 읽은 독자들 앞에서 한 말이다. 그 비합리적 사회 구조의 관행적 행태와 그 근원을 이 작품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의 말이기도 하다.
「우상의 눈물」이 발표된 70년대 말, 아니 오늘도 세상은 여전히 그렇다. 가장 질 나쁜 폭력은 교활한 지혜의 위선이다. 특히 합법을 구실로 내세운 그 폭력 앞에 진실이 감춰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우리’의 일사불란한 행진에 장애가 되는 ‘나’ 혹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잘려 나가는, 획일화 그 동일시의 악랄한 힘에 대한 분노를 우의로 빚어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내 작품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인터넷 블로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문학성은 탁월한데 작품 읽기가 몹시 거북하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작가가 강철 멘탈, 그렇게 독한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무서운 이야기, 우와, 대단한 독자다.
무서운 이야기? 더 무섭고 대단한 독자!
무서운 이야기, 당연히 어둠의 자식들이다. 밝지 않고 음침하다. 선보다는 악, 풍요보다는 결핍, 잘난 놈보다는 열외의 아웃사이더, 가해보다는 피해에 대해, 성공보다는 실패 쪽에 패 놓기. 반듯함보다는 일그러진 것, 정제된 아름다움보다 예측 불가능 상태의 카오스를 좋아한다. 작가로서의 내 상상이 맘껏 뛰놀 수 있는 텃밭이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아티스트 오태원 작가가 「우상의 눈물」을 모티브 삼아 표현한 작품인 <낯선 물방울 그리고 고독>
소설 「우상의 눈물」을 모티브로 한 아티스트 오태원의 사진 작품 앞에 섰다. <낯선 물방울 그리고 고독>이란 제목의 이 사진 작품 몇 점은 조형 설치, 영상 등의 연출을 통해 물방울이 곧 눈물이라는 아포리즘으로 승화되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방울, 떨어지거나 맺힌, 물의 작은 덩이, 그 투명함은 형태 지속의 한계를 알리는 초침일 터이다. 그리하여 그 영롱하고 또렷한 동그라미는 물의 욕망, 존재하는 동안 한껏 빛나고 싶은 물의 꿈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물방울의 작가는 물방울로 말한다. 내 물방울 속에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 있다고. 흐르는 눈물이 모두 그 어떤 영혼들의 현신(現身, 자신을 보여줌)이라고,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저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고.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물이 물방울이 되는 순간 물의 동시성 혹은 획일화를 벗어나 또렷이 한 개체로 존재한다. 그 개체의 인식, 서늘하게 붉은 물방울을 끌어안고 있는 저 거친 갯벌의 불화가, 저 숲의 고요를 날카롭게 흔들어 깨우는, 서로 밀어내면서도 당기는 저 위태로운 안티노미(antinomy,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의 현장이 왠지 낯설다. 낯설기에 눈이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무서운 물방울을 봤단 말인가. 그 저작걸이전에서 만난 독자 하나가 소설 「우상의 눈물」 작가한테 질문을 던진다.
“기표, 안 죽었지요?”
작가의 상상 영역에 뛰어든 독자의 상상 발동이다.
전상국 소설가.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 당선으로 등단. 주요 작품으로 『동행』, 『우상의 눈물』, 『우리들의 날개』, 『아베의 가족』, 『플라나리아』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병주국제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경희문학상 등 수상.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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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cid=2367782 <어둠이라야 더 잘 보이는 그 신명>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기표, 최기표가 거두절미 무섭다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떠나는 것으로 단편 소설 「우상의 눈물」은 끝난다.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학교 폭력의 주동자인 문제아 기표가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집을 나갔다는 것인가…….
작가들, 그렇고 그런 뻔한 일에는 눈길조차
작가
작가는 상상, 그 능력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독자를 꾀는 그 내숭의 작의라든가 그 이야기 속에 괴물을 등장시켜 세속의 모범 인생들을 엿 먹이는 일 등 작가는 분명 이제까지의 제대로 된 상태를 부정하거나 아예 딴판 세상을 펼쳐 보이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상상 에너지로 충전된 이 로맨티시스트들은 그 식성부터가 까다롭다. 잘 차려진 진수성찬은 물론 늘 보는 그렇고 그런 밥상 따위는 눈길도 안 준다. 널려 있는 것, 그렇고 그런 뻔한 것은 결코 자기가 찾는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투정한다. 그들은 항상 허기진 눈으로 여기가 아닌 거기, 이것이 아닌 저것인,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대학 다닐 때 읽은 최재서(영문학자 겸 문학평론가, 1908-1964)의 『문학원론』 속 콜리지(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 1872-1834)의 천재론을 기억하고 있다. 문학은 개성의 표현, 문학이 하나의 예술일진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그 무엇을 가져야 한다,는 예술의 원천적 가치가 개성에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바로 특이한 그 무엇에 집착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야말로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아름다움을 찾는 독창성, 즉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로 드러난다. 그러할 때 독자들은 소설 읽기 몰입의 경지에서 작가의 그 상상력을 천재성으로 읽는다.
거짓말에 담긴 개연적 진실, 작가의 신명
아무튼 소설은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거짓말 이야기다. 거짓말, 뭔가를 믿게 하기 위한 서사 구조의 생태적 전략이다.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을 수 있는, 누구도 못 본 것을 봤다는데 믿지를 않으니 어쩌랴, 거짓말이라도 보태 그것을 믿게 할 수밖에.
그렇게 허구의 개연적 진실을 역설하는 작가의 그 자부가 글쓰기의 신명으로 이어진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곧 보이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그렇고 그런 현실, 기존의 그 인식을 부정하거나 아예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 더 값진 가치, 더 좋은 의미를 자신이 하는 거짓말 이야기 속에 넌지시 비추기 위한 능청과 시치미 떼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다.
그리하여 작가가 그려내는 그 낯선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엉뚱 생뚱맞고 때로 난해하여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슬픔이 그냥 슬픔이 아니고 분노의 디테일 또한 자못 섬뜩하다. 지금까지 별것 아닌 것이 이처럼 심각하다는 데 이르러 독자들은 손에 땀까지 밴다. 새롭고 신비한 것을 보는 당신들의 그 긴장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바람이 먹힌 것이다.
궁극적으로 소설은 인물 탐구, 그 캐릭터 만들기에 이르러 작가들의 상상은 절정에 이른다. 만약 인물의 전형성만으로도 가치를 갖는 전대 소설 춘향전을 이 시대의 작가가 다시 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춘향과 이몽룡의 단순 긍정 그 이미지를 변화무쌍의 복잡미묘한 부정형 캐릭터로 바꾸는 일만으로도 어금니에 기쁨의 엔도르핀이 괼 것이다.
괴이쩍고 난해하고 요령부득인 소설 속 인물들
이상 <날개>(이미지 출처 : 알라딘)
“박제가 된 천재를 아느냐?”
이런 첫 문장으로 이상의 소설 「날개」가 펼쳐진다. 몸을 파는 아내의 방에서 고작 화장품 냄새나 즐기는, 자의식 과잉의 정신분열자를 자처하여 위트와 패러독스를 얼굴에 분칠한 채 낄낄거리는 한심한 인간이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내가 비록 박제가 되긴 했어도 나는 여전히 천재이니,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작가 이상의 꿍꿍이셈과 그 뒤에서 짓고 있을 웃음이 보인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작가 이상의 천재성을 담보로 그가 만들어낸 정신분열증 환자를 이상과 동일시하면서, 주인공의, 현실을 떠나 훨훨 날고 싶은 욕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괴이쩍고 난해한, 요령부득의 모호함 속에서 독자들은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와 카프카의 「변신」 속 한 벌레와 『성』 속의 K를 만난다.
이런 류의 불편한 소설과의 만남일수록 독자들은 그 작가를 넘어서는 온갖 오성과 감각을 동원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불편하면 편하게 하기. 그리하여 독자의 상상력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 하나에서도 어떤 낌새를 냄새 맡는다. 『성』의 주인공 이니셜 K와 그의 연인 프리이다에서 어떤 암시를 얻는가 하면 장용학의 『요한 시집』 속 주인공 누혜나 김용성의 『리빠똥 장군』의 리빠똥이라는 낯선 이름 앞에서 긴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민중, 70년대만 해도 내놓고 쓰지 못하던 낱말이다. 그런 시대, 진실의 은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침묵의 눈」이란 다소 섬뜩한 제목의 단편소설에 ‘민중’이란 이름의 등장인물을 등장시켰다가 필화를 입은 적이 있다. 이후 다른 작품에서 민중을 ‘민지웅’으로 슬쩍 감춰 쓰는 즐거움도 괜찮았다.
전상국 <아베의 가족>(이미지 출처 : 알라딘)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작가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돼 방영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MBC 드라마 <아베의 가족>(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중편 소설 『아베의 가족』의 주인공은 백치다. 그 저능아를 아베라고 불렀다. 아베, 백치가 입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 덧붙여 백치가 힘껏 소리 내어 부르는 아베, 아버지의 방언이다. 부권 상실 시대, 제대로 된 아버지가 없어서 생긴 비극을 에둘러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의 아베, 비극의 씨앗이 아닌, 마땅히 찬미받아야 할 성스러운 존재라는 뜻의 아베 마리아의 그 아베.
이쯤에서야 비로소 작가는 ‘아베는 누구인가’, ‘아베는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물음을 독자에게 던질 수 있는 것이다.
학폭 주동자의 가출, 무엇이 무서웠길래
전상국 <우상의 눈물>(이미지 출처 : 알라딘)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기표, 최기표가 거두절미 무섭다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떠나는 것으로 단편 소설 「우상의 눈물」은 끝난다.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학교 폭력의 주동자인 문제아 기표가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집을 나갔다는 것인가. 작가가 마음을 다잡고 남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곧 작가보다 한결 빼어난 상상력을 가진 독자들에 대한 예우이자 기대인 것이다.
“오래전에 발표된 이 작품이 지금도 긴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소설에서 우의1)로 다룬 당대의 비합리적 사회구조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1) 우의 : 寓意,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어느 사회학자가 「우상의 눈물」을 읽은 독자들 앞에서 한 말이다. 그 비합리적 사회 구조의 관행적 행태와 그 근원을 이 작품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의 말이기도 하다.
「우상의 눈물」이 발표된 70년대 말, 아니 오늘도 세상은 여전히 그렇다. 가장 질 나쁜 폭력은 교활한 지혜의 위선이다. 특히 합법을 구실로 내세운 그 폭력 앞에 진실이 감춰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우리’의 일사불란한 행진에 장애가 되는 ‘나’ 혹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잘려 나가는, 획일화 그 동일시의 악랄한 힘에 대한 분노를 우의로 빚어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내 작품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인터넷 블로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문학성은 탁월한데 작품 읽기가 몹시 거북하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작가가 강철 멘탈, 그렇게 독한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무서운 이야기, 우와, 대단한 독자다.
무서운 이야기? 더 무섭고 대단한 독자!
무서운 이야기, 당연히 어둠의 자식들이다. 밝지 않고 음침하다. 선보다는 악, 풍요보다는 결핍, 잘난 놈보다는 열외의 아웃사이더, 가해보다는 피해에 대해, 성공보다는 실패 쪽에 패 놓기. 반듯함보다는 일그러진 것, 정제된 아름다움보다 예측 불가능 상태의 카오스를 좋아한다. 작가로서의 내 상상이 맘껏 뛰놀 수 있는 텃밭이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아티스트 오태원 작가가 「우상의 눈물」을 모티브 삼아 표현한 작품인 <낯선 물방울 그리고 고독>
소설 「우상의 눈물」을 모티브로 한 아티스트 오태원의 사진 작품 앞에 섰다. <낯선 물방울 그리고 고독>이란 제목의 이 사진 작품 몇 점은 조형 설치, 영상 등의 연출을 통해 물방울이 곧 눈물이라는 아포리즘으로 승화되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방울, 떨어지거나 맺힌, 물의 작은 덩이, 그 투명함은 형태 지속의 한계를 알리는 초침일 터이다. 그리하여 그 영롱하고 또렷한 동그라미는 물의 욕망, 존재하는 동안 한껏 빛나고 싶은 물의 꿈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물방울의 작가는 물방울로 말한다. 내 물방울 속에는 수많은 눈물이 담겨 있다고. 흐르는 눈물이 모두 그 어떤 영혼들의 현신(現身, 자신을 보여줌)이라고,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저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고.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물이 물방울이 되는 순간 물의 동시성 혹은 획일화를 벗어나 또렷이 한 개체로 존재한다. 그 개체의 인식, 서늘하게 붉은 물방울을 끌어안고 있는 저 거친 갯벌의 불화가, 저 숲의 고요를 날카롭게 흔들어 깨우는, 서로 밀어내면서도 당기는 저 위태로운 안티노미(antinomy,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의 현장이 왠지 낯설다. 낯설기에 눈이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무서운 물방울을 봤단 말인가. 그 저작걸이전에서 만난 독자 하나가 소설 「우상의 눈물」 작가한테 질문을 던진다.
“기표, 안 죽었지요?”
작가의 상상 영역에 뛰어든 독자의 상상 발동이다.
전상국
소설가.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 당선으로 등단. 주요 작품으로 『동행』, 『우상의 눈물』, 『우리들의 날개』, 『아베의 가족』, 『플라나리아』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병주국제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경희문학상 등 수상.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cid=2367782 <어둠이라야 더 잘 보이는 그 신명>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