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인문 플랫폼 인문360과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예술상처를 기억하는 연극의 방식

2021-04-12
상처를 기억하는 연극의 방식

 

<택시운전사>가 올해 첫 천만 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1980년대 광주의 기억을 호명하는 이 영화는 우연히 역사적 순간의 중심에 서게 된 평범한 택시운전사를 통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역사의 기억을 불러온다. 연극에서 과거의 기억이 호출되는 과정은 보다 직접적이다. 그래서 연극평론가 안치운은 연극을 “항상 새롭게 기억하고 기억을 재생산하는 예술”로 정의하기도 한다. 여기서 기억은 특정한 사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경험하거나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경험치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러나 때로는 기억 그 자체가 목적인 연극도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연극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다. 애도하는 유족들을 향한 몰상식한 비난들이 상식 이하의 수준으로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당연한 애도마저도 거부당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만 없던 젊은 연극인들은 세월호를 소재로 한 릴레이 연극을 기획한다.

 

연극 시리즈 <세월호> 2015년 포스터

▲ 연극 시리즈 <세월호> 2015년 포스터

 

혜화동 1번지 6기 동인이 중심이 된 릴레이 연극 시리즈 <세월호>는 2015년 8월 첫 공연을 올렸다. 당시 올린 9편의 작품 중에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그날의 아픔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작품도 있었지만, 날것 그대로 기억을 기록하려는 작품들도 있었다. 무브먼트 당당의 <그날, 당신도 말할 수 있나요> 역시 그러한 작품이었다. 그날의 기억들을 수집해서 말로 정리하고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목적은 달성됐다. 애도를 방해하고 비난하는 정권에 맞서 오히려 날것 그대로의 기억을 사진 찍듯 기록하는 것이 책무인 양 작품은 두 눈 부릅뜨고 그날을 기억하려 했다. 사실을 보편적인 메시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예술이지만 젊은 예술가들은 기꺼이 예술의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역사의 책무를 행하는 것으로 또 다른 예술의 길을 걸었다.

 

세월호 연극 시리즈 <세월호 2017> 중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 세월호 연극 시리즈 <세월호 2017> 중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3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 시리즈는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의 시간에 멈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세월호 2017>은 정권도 바뀌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의 기억을 조금은 다양한 시각으로 기록했다. 최근 들어 세월호의 연극 중에는 피해 당사자들을 참여시키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이러한 연극들은) 감정 과잉의 단순한 애도를 넘어 애도하는 자들이 주체가 되어 애도 자체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세월호 2017> 작품 중 유가족 어머니로 구성된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는 유가족이 거주하는 한 빌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코믹한 상황 설정으로 담아냈다. 다양한 이웃들의 태도를 통해 상처를 대하는 주변의 시선을 다각도로 보여주었다. 세월호 가족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 존재이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큰 위로가 되어준 이웃들을 연기하면서 매우 복잡한 심경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코믹극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잊지 않기 위해 까먹는 여자

 

‘기억’이라는 주제를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배삼식 작가의 <먼 데서 오는 여자>였다.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휘발되고 흐릿해지면서 아픔과 상처조차도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부패하지 않은 미라처럼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상처가 있다. 충분한 애도와 회생이 삭제된 상처는 아물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덧나서 더 강한 고통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2003년 대구에서 일어난 지하철 참사를 기억할 것이다. 지적장애인이 벌인 화재였지만 피해를 키운 것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시스템이었다. 192명이 숨지고 146명이 부상당한 끔찍한 사고였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렸고 기억하겠다고 했지만 이후 유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모를 신경 쓰는 이들은 많지 않다. <먼 데서 오는 여자>는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딸을 잃은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다.

 

(왼쪽) 화재로 검게 그을린 대구 지하철 역사 벽면에 새겨진 ‘사랑해요’ 등의 글씨 (오른쪽)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포스터

▲ (왼쪽) 화재로 검게 그을린 대구 지하철 역사 벽면에 새겨진 ‘사랑해요’ 등의 글씨 (오른쪽)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포스터

 

대구의 한 공원에서 중년의 남녀가 대화를 나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새색시처럼 새초롬하게 낯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를 통해 여자의 남편이 현재 중동에 나가 있고, 중년의 남자는 그 여인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둘의 관계가 밝혀지는데 여자는 치매로 신혼 시절 중동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시절을 사는 중이고, 남자는 그녀의 남편으로 숱한 세월을 겪은 후 치매에 걸린 부인을 간호하고 있다. 여인은 아주 가끔 제정신을 차릴 때가 있지만 대부분은 신혼 시절, 남편과 처음 만나던 시절, 그리고 더 과거로 가서 부모님을 잃고 식모살이를 할 때 보호원에 버린 동생이 도와달라고 협박하던 시절의 기억을 꺼내 놓는다. 그리고 주변을 떠도는 기억, 공원과 관련된 어떤 기억이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 같지만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지만 잊히지도 않는 그 기억, 불탄 냄새의 기억을 결국 여인은 생각해낸다. 그것은 대학생이 된 자신의 딸을 대구 지하철 참사로 잃었던 그 날의 기억이자, 그 유골을 이곳 공원에 묻게 되기까지의 참담한 일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여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옆에 있는 이 낯익은 남자는 누구인지 자꾸 잊었다. 하지만 그녀는 잊지 못했다. 잘 보살펴준 주인집의 돈을 훔친 기억을, 동생을 버리고 떠난 날의 기억을, 가슴이 아리도록 남편을 기다리던 숱한 세월의 기억을, 그리고 딸을 잃은 기억을 그날의 냄새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기억하기 위해 그날을 살아가고 그래서 현재를 기억하지 못한다.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공연 모습 01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공연 모습 02

▲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 공연 모습

 

<먼 데서 오는 여자>는 대구 지하철 참사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건 이후의 기억을 기록한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 대해 정부는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했지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방치해 버렸다. 대구에 가면 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곳이 있다. 원래 이곳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희생자를 위한 기념 공원으로 기획된 곳이다. 그러나 추모 시설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지역 주민들이 공원 내에 추모관이나 위령탑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면서 추모 공원 진행이 지지부진해진다. 그러자 대구시에서는 절충안으로 일단 공원 사업 진행을 위해 유족들과 이면 합의를 하고 안전을 위한 테마파크를 세우기로 한다. 그러나 추모 묘역 조성, 위령탑 건립안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목장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족들은 시가 눈감아주기로 하고 32명의 유골을 새벽에 묻는다. 유족들은 마치 도둑처럼 새벽에 전세 버스를 타고 숨어와 이미 파 놓은 구덩이에 32명의 유골을 묻고 갔다. 이후 누군가의 고발로 이것이 법정 다툼으로까지 번지면서 유족들은 졸지에 암매장꾼이 된다. 작가 배삼식은 주로 역사에 기록되는 주인공이 아닌, 그 바깥에 존재했던 인물들을 상상하고 기록함으로써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는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먼 데서 오는 여자>에서 시민안전테마파크가 만들어지고 유족들이 당했던 수치스러운 일들을 남자의 입을 통해 기록하는 데 집중한다. 이 부분이 작품 중에서 좀 동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그들에게 행했던 폭력을 사실 그대로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현재 우리 민낯을 볼 수 있었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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