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질문] 개인의 수명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 질문자 - 이정모(국립과천과학관 관장)
Q. 존경하는 김경집 선생님께 여쭙니다. 현재 추세라면 과학과 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150살 이상으로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정된 지구 안에서 무한히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지구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위적인 수명 조절이 필요한 시대가 올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정은 어떤 기준으로 누가 해야 할까요?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인문학자 김경집
A. 유병장수 시대...죽음의 결정권은 스스로 가져야
셰익스피어 시대만 해도 ‘in the wrong side of the forties’라는 관용어가 흔히 쓰였습니다. 지금은 사전에서도 그 관용어는 사라졌지요. ‘40대의 나쁜 쪽’이 뭘까요? 학부 시절 셰익스피어 시대의 글을 읽다가 그 대목에서 해석이 어색했습니다. 미국인 교수에게 물었더니 ‘40대 후반’을 뜻하는, 당시의 관용어였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와 현대 초기까지만 해도 40대 후반쯤 되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
100년전 기대수명 40대 후반... 지금은 80세
환갑잔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친가의 일가친척 가운데 딱 두 분의 환갑잔치가 열렸습니다. 종조할머니 한 분과 다른 종조할아버지가 몇 해의 차이를 두고 환갑을 맞으셨습니다. 그게 제가 경험한 환갑잔치의 전부입니다. 팔촌까지 모든 가족들이 모여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깔고는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90세 가까이 사셨고 외가로는 장수하는 편이었지만 환갑까지 넘겨 사는 부계 친척들이 별로 없었지요. 어린 저는 인간은 대략 60세까지 살면 끝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조할아버지는 긴 수염에 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으셔서 늘 무섭고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나이가 그 할아버지보다 많습니다.
이제는 환갑잔치를 하자고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예순 번째 생일에 불과하지요. 먼 옛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수명이 증가한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을까요? 지금 대한민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80을 오르내립니다. 20세기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바로 괄목할 수명의 연장이지요. 바로 전 세기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이 40대 후반쯤이었는데. 셰익스피어 시대만 해도 ‘in the wrong side of the forties’라는 관용어가 흔히 쓰였습니다. 지금은 사전에서도 그 관용어는 사라졌지요. ‘40대의 나쁜 쪽’이 뭘까요? 학부 시절 셰익스피어 시대의 글을 읽다가 그 대목에서 해석이 어색했습니다. 미국인 교수에게 물었더니 ‘40대 후반’을 뜻하는, 당시의 관용어였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와 현대 초기까지만 해도 40대 후반쯤 되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지요. 그걸 비교해보면 지금의 수명 연장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장수의 삶에 대한 준비가 없으면
러시아 생물학자 메치니코프(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금 같으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질병들에도 예전 사람들은 쉽게 생명을 마감했습니다. 병명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그런 경우 ‘급사’(急死)‘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장 무서운 질병이 ‘숙환’(宿患)1)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난 유명한 사람들의 병명이 거의 다 숙환이었기 때문이지요. ‘몸에 달고 산’ 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하물며 그 이전의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0세기에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의학, 약학, 위생, 섭생 등의 조건이 빠르게 진보했고 노동의 강도는 나날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기존의 불치병이나 치명적 질병으로 여기는 것들이 하나하나 정복되고 있으니 갈수록 수명은 증가할 것입니다.
1) 숙환 : 오래 묵은 병
190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생물학자 메치니코프(Ilya Mechnikov, 1845~1916)는 인류가 1900년부터 생명을 무한정으로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며 식습관만 바꾸면 14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0세를 겨우 넘기고 사망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치니코프의 주장에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지금 그의 예언(?)은 이미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아마도 100세는 거뜬하게 넘길 듯합니다. 유엔에서도 이제는 청년의 연령대를 조정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된 건 분명히 과학의 발전 덕에 누리는 혜택들입니다.
분명히 오래 사는 건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하기만 할 것만은 아닌 듯해서 조금 우울하기도 합니다. 평균 12년쯤은 질병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이른바 ‘유병장수’의 어두운 뒷모습입니다. 이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그래서 ‘untimely death’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죽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기는 하지만 그저 오래 살기만 하는 게 축복이 아닌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갈수록 그걸 실감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수명이 80년쯤 되었다면 모를까 겨우 20세기 들어서야 60세 문턱을 넘었으니 우리의 몸이 장수에 걸맞게 진화하지 못한 건 분명한 일입니다. 어떤 의사는 그러더군요. 우리의 몸은 대략 40~50년쯤 쓰다 마감하게 진화했을 것이라고. 그 나머지는 과학 덕분에 얻는 덤이라며 건강과 섭생에 신경 쓰며 적절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빠른 쇠퇴를 막을 수 없답니다. 저도 몇 해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 시술을 받았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저도 ‘급사’로 삶을 마감했을 겁니다. 퇴원하기 전에 여러 검사를 받았는데 걱정하던 대로 여기저기 고장 난 상태를 확인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검진하고 지속적으로 약을 처방 받습니다. 더불어 게으른 몸을 추슬러 운동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거의 퇴직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몸은 건강하지요. 그러나 경제활동에서 배제되고 무력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게다가 몸은 나날이 쇠잔해집니다. 평균수명까지 산다고 가정해도 거의 20년쯤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합니다. 앞 세대가 오래 살고 오래 일하면서 사회 경제적 시스템이 거기에 맞게 변화하고 선배들의 좋은 본보기가 있었더라면 많이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런 일반적 사례는 찾을 수 없으니 그저 막막하기만 하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유병장수는 반갑지 않다고,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고 가족들에게 큰 부담만 되며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면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면 좋겠다고. 물론 막상 그럴 때가 되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아등바등할 것임을 우리 모두 알면서도 그 말에 수긍하고 동의했습니다. 장수는 고마운 축복이지만 막상 장수하는 삶에 대해서는 학습도 경험도 없으며 좋은 모델도 찾기 어려우니 그야말로 대략난감입니다. 그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에 겨우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그런 장수가 과연 행복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
모든 생물은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죽음은 살아있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확실히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막상 죽음과 이후에 대한 설명은 과학조차 온전히 전해주지 못합니다. 남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렵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입니다. 사랑하는 이, 가족 등의 관계라면 죽음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겁니다.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뜻밖에도 죽음에 대해 깊이 다룬 철학자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고 했고 칸트와 공자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했습니다. 죽음은 앎(인식)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고 다만 생각(사유)의 차원에서만 상정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는 아예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죽음은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실존이 부재하게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요. 키르케고르가 평생 불안이라는 주제에 매달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죽음’, ‘절망’, ‘염려’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죽음을 삶의 한 현상이며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건너뛸 수 없는 존재가능 ‘앞에서’의 불안입니다. 삶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죽음을 떼어놓고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철학에서만 죽음이라는 주제가 민감한 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정의는 각 분야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심장사, 세포사 등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지요.
나는 죽음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살아있는 한 누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출가 동기도 그것이었을 만큼 무거운 주제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절대적 신념은 보편적 주제입니다. 거기에 맞닿은 죽음의 문제 또한 결코 쉽거나 가벼울 수 없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떤 주(州)에서 오랜 논의 끝에 안락사를 입법화했다가 같은 해 말에 다시 사문화했던 것은 죽음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정모 관장님은 고약하게도 제게 이 민감한 문제를 던졌습니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아니라 장수에 따른 인구 문제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인위적 수명 조절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는데 그 결정을 어떤 기준으로 누가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민감할 뿐 아니라 도발적이며 부담스러운 질문입니다. 20세기 들어 인구는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데 앞으로는 더 그렇겠지요. 대한민국은 인구 감소를 걱정하고 있지만 세계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니 그런 고민은 당연하겠지요. 게다가 갈수록 노년층의 인구구성이 늘어나는 상황은 여러모로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위적 수명 조절이 가능한지, 어떤 기준을 삼을지, 그리고 ‘누가’ 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매우 어렵습니다. 앞서 소개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주에서 있었던 안락사 입법과 사문화 과정이 보여주는 건 생명의 결정권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문제인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자칫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사용했던 폭력적인 논거들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여간 심각하고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도나 법률로 제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할까요? 이 또한 가볍고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내 삶과 죽음의 주인인가?
임종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때인 듯합니다. 무작정 오래 산다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리 멋진 일만은 아닙니다. 이미 유병장수(有病長壽)의 시대입니다. 삶의 존엄성과 질은 현저히 추락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모두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모두의 현실입니다. 각 가정마다 늙은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누워 들어가서 걸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걸어 들어가서 누워 나오는’ 게 요양원이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면서도 이를 따르는 것은 임종을 연장시키는 것이, 자식으로서 마땅한 도리라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뒤집어 말하면 죽음의 결정은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 내리는 것이라는 뜻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고대 인도인들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베다 경전에 보면 ‘임서기(林棲期)’라는 말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인생을 셋 혹은 네 단계로 나눠 ‘학습기-가주기(家住期)-임서기/유행기’로 구분했습니다. 사회적 의무를 벗어나 산속에 들어가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게 임서기고 거주지 없이 걸식하며 돌아다니는 게 유행기입니다. 대개는 집 가까운 숲에 들어가 수행하면서 가끔씩 집에 내려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임서기는 아마도 지금 퇴직한 중년쯤에 해당되고 유행기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시기쯤 되겠지요.
저는 지금 임서기에 들어선 나이입니다. 언젠가 유행기에 들어서겠지요. 온갖 과학적 장비로 제 생명은 연장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연명치료를 거부합니다. 자식들에게도 선언했습니다. 삶의 질과 경제적 비용이라는 문제에 국한한 게 아닙니다. ‘존재의 의미’ 자체가 소멸했을 때 생물학적 생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공감을 확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좀 더 또렷하게 인식하고 성찰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모든 결정권을 타인의 손에 쥐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과학의 힘을 빌려 무한정 생명을 연장하기만 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도 언젠가 신체가 완전히 쇠잔해지고 정신도 무기력해질 때가 오겠지요. 바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조차 없게 될 때 저는 더이상 지상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적어도 제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싶습니다.
관장님은 사회적, 지구생태적 범위에서 죽음의 결정권을 물으셨는데 저는 개인의 결정과 소회로 답해드려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새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게 해주셔서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 교수. 2010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책탐>) 2016년 ‘한 도시 한 책’ 순천, 포항, 정읍 동시 선정(<엄마인문학>) 2018년 ‘전라남도 올해의 책’ 선정(앞으로 10년 대한민국 골든타임>) 2018년 ‘고양시민이 뽑은 올해의 책’ 선정(김경집의 통찰력강의>) <나이듦의 즐거움>, <인문학은 밥이다>, <생각의 융합>, <엄마인문학> 등 4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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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4&cid=2367520 <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달의 질문] 개인의 수명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 질문자 - 이정모(국립과천과학관 관장)
Q. 존경하는 김경집 선생님께 여쭙니다. 현재 추세라면 과학과 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150살 이상으로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정된 지구 안에서 무한히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지구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위적인 수명 조절이 필요한 시대가 올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정은 어떤 기준으로 누가 해야 할까요?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인문학자 김경집
A. 유병장수 시대...죽음의 결정권은 스스로 가져야
셰익스피어 시대만 해도 ‘in the wrong side of the forties’라는 관용어가 흔히 쓰였습니다. 지금은 사전에서도 그 관용어는 사라졌지요. ‘40대의 나쁜 쪽’이 뭘까요? 학부 시절 셰익스피어 시대의 글을 읽다가 그 대목에서 해석이 어색했습니다. 미국인 교수에게 물었더니 ‘40대 후반’을 뜻하는, 당시의 관용어였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와 현대 초기까지만 해도 40대 후반쯤 되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
100년전 기대수명 40대 후반... 지금은 80세
환갑잔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친가의 일가친척 가운데 딱 두 분의 환갑잔치가 열렸습니다. 종조할머니 한 분과 다른 종조할아버지가 몇 해의 차이를 두고 환갑을 맞으셨습니다. 그게 제가 경험한 환갑잔치의 전부입니다. 팔촌까지 모든 가족들이 모여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깔고는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90세 가까이 사셨고 외가로는 장수하는 편이었지만 환갑까지 넘겨 사는 부계 친척들이 별로 없었지요. 어린 저는 인간은 대략 60세까지 살면 끝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조할아버지는 긴 수염에 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으셔서 늘 무섭고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나이가 그 할아버지보다 많습니다.
이제는 환갑잔치를 하자고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예순 번째 생일에 불과하지요. 먼 옛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수명이 증가한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을까요? 지금 대한민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80을 오르내립니다. 20세기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바로 괄목할 수명의 연장이지요. 바로 전 세기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이 40대 후반쯤이었는데. 셰익스피어 시대만 해도 ‘in the wrong side of the forties’라는 관용어가 흔히 쓰였습니다. 지금은 사전에서도 그 관용어는 사라졌지요. ‘40대의 나쁜 쪽’이 뭘까요? 학부 시절 셰익스피어 시대의 글을 읽다가 그 대목에서 해석이 어색했습니다. 미국인 교수에게 물었더니 ‘40대 후반’을 뜻하는, 당시의 관용어였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와 현대 초기까지만 해도 40대 후반쯤 되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지요. 그걸 비교해보면 지금의 수명 연장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장수의 삶에 대한 준비가 없으면
러시아 생물학자 메치니코프(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금 같으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질병들에도 예전 사람들은 쉽게 생명을 마감했습니다. 병명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그런 경우 ‘급사’(急死)‘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장 무서운 질병이 ‘숙환’(宿患)1)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난 유명한 사람들의 병명이 거의 다 숙환이었기 때문이지요. ‘몸에 달고 산’ 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하물며 그 이전의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0세기에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의학, 약학, 위생, 섭생 등의 조건이 빠르게 진보했고 노동의 강도는 나날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기존의 불치병이나 치명적 질병으로 여기는 것들이 하나하나 정복되고 있으니 갈수록 수명은 증가할 것입니다.
1) 숙환 : 오래 묵은 병
190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생물학자 메치니코프(Ilya Mechnikov, 1845~1916)는 인류가 1900년부터 생명을 무한정으로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며 식습관만 바꾸면 14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0세를 겨우 넘기고 사망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치니코프의 주장에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지금 그의 예언(?)은 이미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아마도 100세는 거뜬하게 넘길 듯합니다. 유엔에서도 이제는 청년의 연령대를 조정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된 건 분명히 과학의 발전 덕에 누리는 혜택들입니다.
분명히 오래 사는 건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하기만 할 것만은 아닌 듯해서 조금 우울하기도 합니다. 평균 12년쯤은 질병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이른바 ‘유병장수’의 어두운 뒷모습입니다. 이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그래서 ‘untimely death’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죽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기는 하지만 그저 오래 살기만 하는 게 축복이 아닌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갈수록 그걸 실감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수명이 80년쯤 되었다면 모를까 겨우 20세기 들어서야 60세 문턱을 넘었으니 우리의 몸이 장수에 걸맞게 진화하지 못한 건 분명한 일입니다. 어떤 의사는 그러더군요. 우리의 몸은 대략 40~50년쯤 쓰다 마감하게 진화했을 것이라고. 그 나머지는 과학 덕분에 얻는 덤이라며 건강과 섭생에 신경 쓰며 적절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빠른 쇠퇴를 막을 수 없답니다. 저도 몇 해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 시술을 받았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저도 ‘급사’로 삶을 마감했을 겁니다. 퇴원하기 전에 여러 검사를 받았는데 걱정하던 대로 여기저기 고장 난 상태를 확인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검진하고 지속적으로 약을 처방 받습니다. 더불어 게으른 몸을 추슬러 운동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거의 퇴직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몸은 건강하지요. 그러나 경제활동에서 배제되고 무력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게다가 몸은 나날이 쇠잔해집니다. 평균수명까지 산다고 가정해도 거의 20년쯤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합니다. 앞 세대가 오래 살고 오래 일하면서 사회 경제적 시스템이 거기에 맞게 변화하고 선배들의 좋은 본보기가 있었더라면 많이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런 일반적 사례는 찾을 수 없으니 그저 막막하기만 하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유병장수는 반갑지 않다고,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고 가족들에게 큰 부담만 되며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면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면 좋겠다고. 물론 막상 그럴 때가 되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아등바등할 것임을 우리 모두 알면서도 그 말에 수긍하고 동의했습니다. 장수는 고마운 축복이지만 막상 장수하는 삶에 대해서는 학습도 경험도 없으며 좋은 모델도 찾기 어려우니 그야말로 대략난감입니다. 그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에 겨우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그런 장수가 과연 행복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
모든 생물은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죽음은 살아있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확실히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막상 죽음과 이후에 대한 설명은 과학조차 온전히 전해주지 못합니다. 남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렵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입니다. 사랑하는 이, 가족 등의 관계라면 죽음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겁니다.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뜻밖에도 죽음에 대해 깊이 다룬 철학자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고 했고 칸트와 공자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했습니다. 죽음은 앎(인식)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고 다만 생각(사유)의 차원에서만 상정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는 아예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죽음은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실존이 부재하게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요. 키르케고르가 평생 불안이라는 주제에 매달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죽음’, ‘절망’, ‘염려’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죽음을 삶의 한 현상이며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건너뛸 수 없는 존재가능 ‘앞에서’의 불안입니다. 삶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죽음을 떼어놓고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철학에서만 죽음이라는 주제가 민감한 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정의는 각 분야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심장사, 세포사 등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지요.
나는 죽음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살아있는 한 누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출가 동기도 그것이었을 만큼 무거운 주제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절대적 신념은 보편적 주제입니다. 거기에 맞닿은 죽음의 문제 또한 결코 쉽거나 가벼울 수 없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떤 주(州)에서 오랜 논의 끝에 안락사를 입법화했다가 같은 해 말에 다시 사문화했던 것은 죽음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정모 관장님은 고약하게도 제게 이 민감한 문제를 던졌습니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아니라 장수에 따른 인구 문제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인위적 수명 조절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는데 그 결정을 어떤 기준으로 누가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민감할 뿐 아니라 도발적이며 부담스러운 질문입니다. 20세기 들어 인구는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데 앞으로는 더 그렇겠지요. 대한민국은 인구 감소를 걱정하고 있지만 세계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니 그런 고민은 당연하겠지요. 게다가 갈수록 노년층의 인구구성이 늘어나는 상황은 여러모로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위적 수명 조절이 가능한지, 어떤 기준을 삼을지, 그리고 ‘누가’ 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매우 어렵습니다. 앞서 소개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주에서 있었던 안락사 입법과 사문화 과정이 보여주는 건 생명의 결정권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문제인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자칫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사용했던 폭력적인 논거들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여간 심각하고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도나 법률로 제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할까요? 이 또한 가볍고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내 삶과 죽음의 주인인가?
임종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때인 듯합니다. 무작정 오래 산다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리 멋진 일만은 아닙니다. 이미 유병장수(有病長壽)의 시대입니다. 삶의 존엄성과 질은 현저히 추락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모두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모두의 현실입니다. 각 가정마다 늙은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누워 들어가서 걸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걸어 들어가서 누워 나오는’ 게 요양원이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면서도 이를 따르는 것은 임종을 연장시키는 것이, 자식으로서 마땅한 도리라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뒤집어 말하면 죽음의 결정은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 내리는 것이라는 뜻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고대 인도인들도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베다 경전에 보면 ‘임서기(林棲期)’라는 말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인생을 셋 혹은 네 단계로 나눠 ‘학습기-가주기(家住期)-임서기/유행기’로 구분했습니다. 사회적 의무를 벗어나 산속에 들어가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게 임서기고 거주지 없이 걸식하며 돌아다니는 게 유행기입니다. 대개는 집 가까운 숲에 들어가 수행하면서 가끔씩 집에 내려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임서기는 아마도 지금 퇴직한 중년쯤에 해당되고 유행기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시기쯤 되겠지요.
저는 지금 임서기에 들어선 나이입니다. 언젠가 유행기에 들어서겠지요. 온갖 과학적 장비로 제 생명은 연장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연명치료를 거부합니다. 자식들에게도 선언했습니다. 삶의 질과 경제적 비용이라는 문제에 국한한 게 아닙니다. ‘존재의 의미’ 자체가 소멸했을 때 생물학적 생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공감을 확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좀 더 또렷하게 인식하고 성찰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모든 결정권을 타인의 손에 쥐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과학의 힘을 빌려 무한정 생명을 연장하기만 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도 언젠가 신체가 완전히 쇠잔해지고 정신도 무기력해질 때가 오겠지요. 바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조차 없게 될 때 저는 더이상 지상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적어도 제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싶습니다.
관장님은 사회적, 지구생태적 범위에서 죽음의 결정권을 물으셨는데 저는 개인의 결정과 소회로 답해드려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새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게 해주셔서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 교수. 2010년 한국출판평론상 수상(<책탐>) 2016년 ‘한 도시 한 책’ 순천, 포항, 정읍 동시 선정(<엄마인문학>) 2018년 ‘전라남도 올해의 책’ 선정(앞으로 10년 대한민국 골든타임>) 2018년 ‘고양시민이 뽑은 올해의 책’ 선정(김경집의 통찰력강의>) <나이듦의 즐거움>, <인문학은 밥이다>, <생각의 융합>, <엄마인문학> 등 4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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