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두 형님이 젊어서 죽고, 비교적 어린 나이인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마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는 대무신왕 무휼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김진은 바로 그 짧은 몇 줄의 기록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끌어 낸다. 신화의 시대와 역사의 시대 사이의 일을, 서로 다른 문명과 세계관의 충돌을, “부자 간의 살”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세대 간, 혹은 부모와 자식의 갈등을......
세계 최장수 MMORPG의 시작은 몇 줄의 짧은 기록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MMORPG 게임 '바람의나라' 서비스 초기 화면(이미지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세계 최초의 MMORPG1), 혹은 세계 최초의 상용화된 MMORPG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 서비스한 MMORPG가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바로 1996년부터 서비스되고 있는 넥슨(NEXON)의 <바람의 나라>다. 세계 최초의 상용화된 MMORPG 중 하나이자 세계 최장수 MMORPG이고, 지금의 넥슨을 만들어 낸 이 게임의 세계관은 신화와 역사가 결합한 초기 고구려와 부여의 세계에 기대고 있다. 바로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 속 세계다.
1) MMORPG : 대규모 다중 접속자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은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왕업을 이어 기반을 다졌다(大朱留王 紹承基業)”라고 기록되었고, 그 시호(諡號)2)만 보아도 신과 같이 용맹한 위대한 왕이 연상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손자이자, 부러진 칼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던 유리왕의 아들이며, 낙랑공주와의 비극적 사랑으로 유명한 호동왕자의 아버지이다. 이들 유명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서, 위로 두 형님이 젊어서 죽고, 비교적 어린 나이인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마흔한 살에 세상을 떠난 대무신왕 무휼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김진은 바로 그 짧은 몇 줄의 기록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신화의 시대와 역사의 시대 사이의 일을, 서로 다른 문명과 세계관의 충돌을, “부자 간의 살”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세대 간, 혹은 부모와 자식의 갈등을.
2) 시호(諡號) :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 붙여주는 호칭
“왜 내게는?” 자식을 미워했던 아버지들
고구려 왕 주몽(이미지 출처 : 한국헤밍웨이)
역사와 설화 속에서 주몽은 천신(天神) 해모수의 아들이자 수신(水神) 하백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하백의 딸이자 주몽의 어머니이며 해모수와 헤어진 후 부여의 금와왕과 다시 혼인한 유화는 농경신의 속성을 보이며 고구려와 부여 양쪽에서 시조모(始祖母)이자 태후로 모셔졌다. 금와왕의 직계 아들인 대소와 일곱 형제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친 주몽은 소서노와 혼인하고 그 지지를 받아 고구려를 세우는데,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새로운 나라인 백제를 세우는 영웅이다.
고구려 유리왕
그리고 <바람의 나라>는 자식들을 미워하는 아버지인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고국인 부여에서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들으며 자란 유리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아버지 주몽은 신과 같이 위대한 영웅이었다. 유리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부러진 칼을 가슴에 품고 고구려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유리가 마주한 것은 창업 공신이자 왕비인 소서노와 그의 두 아들이었다. 갈등 끝에 유리는 태자가 되지만, 소서노와 왕자들은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를 따르는 신하들 역시 소서노를 따른다. 자신으로 인해 ‘위대한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목격한 유리는 평생을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를 자식들에게 투사한다. 이 콤플렉스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신수(神獸)3)다. "기린을 타고 하늘로 돌아간 주몽”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유리에게는 그와 같은 하늘의 표식이 없다. 유리는 그 하늘의 표식, 왕이 될 자의 증거가 없기에 신하들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생각하고 그 표식을 갖고 태어난 자신의 자식들을 질투하며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맏아들인 도절태자를 죽게 하고, 둘째 해명태자에게 자결을 명하고, 어린 아들 여진을 잃고, 셋째 아들 무휼을 의심한다. 딸인 세류공주를 무척 아껴 날개 달린 하늘의 신인(神人)과 혼인시켰지만, 그로 인해 신기(神氣)를 얻고 신수(神獸)를 부리게 되자 요망하다며 내친다.
3) 신수(神獸) : 특별하고 기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
다른 나라라 하여 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경우 하늘이 내린 금빛 개구리를 닮은 아이였던 아버지 금와왕과 달리, 대소와 일곱 형제에게는 하늘의 징표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자손 중 막내아들 갈사왕의 손자이자 족보를 따지자면 무휼의 처남이 되는 용과 불길한 예언을 내뱉으며 잔인한 살생을 거듭하는 채, 단 두 사람만이 하늘의 새를 거느리고 있다. 대소는 용을 총애했으나, 대소의 형제들과 조카들은 용을 질투하여 죽게 만든다. 살아남은 채는 고구려의 궁에 침입하고 그다음에는 낙랑의 왕실에 의탁하며 거듭하여 혼란을 만들어낸다.
낙랑 역시 마찬가지다. 낙랑왕 최리는 하늘의 힘을 가진 두 아들과 어여쁜 고명딸을 사랑한다고 늘 말하지만 두 아들 ‘해의 왕자’ 충과 ‘달의 왕자’ 운은 그 자체가 자명고(自鳴鼓, 스스로 우는 북)와 자명각(自鳴角, 스스로 우는 뿔피리)으로 서로 공명하며 나라를 지키는 도구일 뿐이다. 최리가 아들의 연인이었던 선우를 굳이 빼앗아 왕비로 삼은 것은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추문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버지이자 왕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권력 행사였다. 그 증거로 선우가 낳은 딸 사비(낙랑공주)는 자라는 내내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혼기가 되어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의 정략 결혼에 쓸 수 있게 되어서야 “내 사랑하는 딸”이 된다. 이들 세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은 왕이 될 재목인 자식, 하늘에 선택받은 자의 증표를 가진 자식을 질투하는 아비들과 그 아비를 두려워하거나 패배하여 목숨을 잃은 자식들의 갈등이다.
신의 세계가 인간으로, 시대 전환에 따른 충돌
'바람의나라 연' 주인공 무휼(오른쪽)(이미지 출처 : 바람의나라 홈페이지)
한 나라의 왕위를 두고 빚어지는, 어쩌면 한 가정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김진은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대유(代喩)한다.
평범한 인간인 유리왕이 신의 힘을 가진 자식들을 두려워했듯이 인간은 신을 경외하지만 질투한다. 그런 아비 밑에서 자랐기에 대무신왕 무휼 역시 하늘의 뜻을 직접 사람들에게 전하고 전설 속의 신수(神獸)들을 다스리며 죽은 이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자손들과 하늘의 표식을 이어받은 이들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송옥구나 을두지와 같은 신하들을 등용하고, 각 씨족 집단에 성씨를 내리며, 부족 연합이 아닌 왕에게 권력의 중심추를 옮겨 오며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대무신왕의 시대를 만든 것이다. 이제 큰 무당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춤을 출 권리는 오직 왕에게만 있다. 과거에 신기(神氣)를 지닌 이들이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우고, 죽은 뒤 자신의 신수(神獸)와 함께 하늘로 돌아갔다면, 이제 신기를 지닌 이들은 죽고 신이 되어서야 다음 전장의 주인공이자 호국신이 된다. 하늘의 표식을 지닌 이가 나타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람의 나라>가 말하는 부자간의 살, 세대 간의 갈등은 결국 신화의 시대가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며 벌어지는 충돌의 구체적인 양상이다. 정복 군주로서, “땅 위에서 가장 먼 곳에 깃발을 꽂겠다”는 무휼의 부도4)는 모든 사람들이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향인 “하늘 나무 위의 부도”를 그리는 아들 호동의 꿈과는 상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그중 하나다. 청룡(靑龍)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춘 무휼을 아비로, 주작(朱雀)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부여의 왕자 용을 외숙으로 하는 호동은, 고구려와 부여의 피를 잇고 봉황을 신수로 삼은 그야말로 신화 속 주인공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을 꿈꾸던 그의 의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꺾이고 무너진다. 그리고 무휼의 왕위는 호동이 아닌, 처음부터 행정가였던 자신의 아우 해색주에게 이어진다.
4) 부도(府都) :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곳(모습)을 이르는 말. ‘바람의 나라’에서 말하는 부도는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곳, 신단수가 있는 곳이다. 옛 조선의 땅인 신시이며, 작가는 이곳을 환웅과 해모수, 우리 신화의 상징적인 뿌리로 만들었다. 작가는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중간에 부도지를 한 번 인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이야기를 유사 역사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 전반에 인용된 사서들은 유사 역사학과는 거리가 멀며,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역사와 설화의 기록을 면밀히 조사하여 빈틈없이 만들어 낸 한국적인 환상 세계 위에 존재하고 있다.
'바람의 나라' 호동(이미지 출처 : SE 바람의 나라 중 발췌)
더욱이 무휼은, 고구려와 부여와 낙랑을 통틀어 하늘의 표식을 지니고 왕이 된 마지막 인물이다. 이는 죽은 차비(次妃, 둘째 왕후)의 혼이 돌아와 그의 아들인 어린 호동왕자를 지켜주고 죽은 형님 해명태자의 혼이 부여와의 전쟁에서 함께 선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신화 시대의 최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낙랑전에 참여하는데 이때는 산 형제와 죽은 신하들이 의인화된 사신이자 네 방위의 신으로 함께 진을 짜고 낙랑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고, 죽은 이들과 지상에 내려온 신들은 하늘로 돌아가고, 인간이 좀 더 신에 가까웠던 시절, “하늘 나무 위의 부도”를 꿈꾸며 봉황을 신수로 지녔던 아들 호동 역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인간들의 정쟁(政爭)에 휘말려 죽는다. 호동의 죽음 이후 더이상 죽은 이들과 하늘의 신들을 부릴 왕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온전히 인간들의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문명과 세계관의 충돌은, 고구려와 낙랑의 갈등으로 묘사된다. 고구려와 낙랑은 자신이 옛 조선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낙랑은 한(漢)의 영향을 받아 역법과 풍습을 바꾸었고, 낙랑의 왕성에는 한나라 사신들이 머무르고 있다. 소년 시절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스승인 연비 장군을 잃은 무휼은, 다시는 약하기 때문에 무릎 꿇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수십 년 뒤 그 뜻은 옛 조선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한에게 문화적으로 침식당한 낙랑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연재가 시작되고 29년, 작가는 조선의 뿌리를 이으면서도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려는 고구려와 정체성이 흐릿해진 낙랑, 그리고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는 채가 벌이는, 신화시대의 마지막 전쟁을 그리고 있다.
꾸준히 두려움 없이 새 시대에 발맞춘
'바람의 나라' 만화가 김진(이미지 출처 : 서울&)
우리 역사책 속 짧은 기록을 <바람의 나라>라는 새로운 동양적 환상 세계의 이야기로 확장해 낸 김진 작가는, 현실에서도 만화의 지면을 넘어 여러 매체로 작품 세계를 널리 확장해 나갔다. 아직 본격적인 MUG게임5)이라는 것이 없던 시대, 당시에는 아직 젊었던 김정주6). 송재경7) 대표의 비전에 공감하여 게임 <바람의 나라>를 위한 세계관과 일러스트를 제공하여 새로운 게임의 역사를 열어가는 데 힘을 보냈다. TCG8)라고 하면 미국이나 일본의 게임만 있다고 생각할 때, <바람의 나라>로 TCG를 만들고 싶다는 청년들의 시도에도 힘을 얹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김진은 그 확장된 세계가 멋대로 왜곡되거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 왔다.
5) MUG(Multi User Game) : 텍스트로 이뤄진 게임에 그래픽을 입힌 게임
6) 넥슨 창립자, 현 엔엑스씨 대표이사
7) 현 엑스엘게임즈 대표이사
8) TCG(Trading Card Game) : 트레이딩 카드 게임
뮤지컬 '바람의 나라'
원작의 제1부에 해당하는 소설 <아버지의 나라>를 직접 집필했으며, 서울예술단이 무대에 올린 두 편의 뮤지컬, <바람의 나라-호동>과 <바람의 나라-무휼>의 대본을 직접 쓰고, 공연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예술의 전당에서 무대를 지켜보았다. 다른 작가의 창작물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 이 세계관을 무단으로 차용하고 왜곡하려는 시도에 맞서 법정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만화계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잡지가 폐간되고,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하는 가운에서도 김진 작가는 두려움 없이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유료 웹툰은 고사하고 스크롤 웹툰도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인 2003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상업적 웹툰 사이트 ‘WE6’를 만들어 모니터 비례에 맞춘 형태의 웹 연재를 시도하고, 이후에도 e-book 형태로 연재를 계속했다. 그는 담기는 그릇은 바뀌었을지라도 꾸준하게,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다. 마치 땅 위에서 가장 먼 곳에 깃발을 꽂겠다는 무휼처럼, 한국 만화의 새로운 역사를 계속 만들어가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전혜진 SF 작가, 만화 스토리 작가. 2007년 만화 잡지 『이슈』를 통해 라이트노벨 『월하의 동사무소』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레이디 디텍티브』와 『리베르떼』, 『PermIT!!!』 등의 만화와 『족쇄: 두 남매 이야기』, 『자살 클럽』,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 등의 소설과 에세이집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을 펴냈음. SF 단편집 『홍등의 골목』과 앤솔로지 『다행히 졸업』, 『텅 빈 거품』, 『감겨진 눈 아래에』, 『살을 섞다』, 『5월 18일, 잠수함 토끼 드림』 등에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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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2&cid=2367678 <신화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가 교차하는 그 순간>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위로 두 형님이 젊어서 죽고, 비교적 어린 나이인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마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는 대무신왕 무휼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김진은 바로 그 짧은 몇 줄의 기록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끌어 낸다. 신화의 시대와 역사의 시대 사이의 일을, 서로 다른 문명과 세계관의 충돌을, “부자 간의 살”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세대 간, 혹은 부모와 자식의 갈등을......
세계 최장수 MMORPG의 시작은 몇 줄의 짧은 기록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MMORPG 게임 '바람의나라' 서비스 초기 화면(이미지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세계 최초의 MMORPG1), 혹은 세계 최초의 상용화된 MMORPG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 서비스한 MMORPG가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바로 1996년부터 서비스되고 있는 넥슨(NEXON)의 <바람의 나라>다. 세계 최초의 상용화된 MMORPG 중 하나이자 세계 최장수 MMORPG이고, 지금의 넥슨을 만들어 낸 이 게임의 세계관은 신화와 역사가 결합한 초기 고구려와 부여의 세계에 기대고 있다. 바로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 속 세계다.
1) MMORPG : 대규모 다중 접속자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은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왕업을 이어 기반을 다졌다(大朱留王 紹承基業)”라고 기록되었고, 그 시호(諡號)2)만 보아도 신과 같이 용맹한 위대한 왕이 연상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손자이자, 부러진 칼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던 유리왕의 아들이며, 낙랑공주와의 비극적 사랑으로 유명한 호동왕자의 아버지이다. 이들 유명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서, 위로 두 형님이 젊어서 죽고, 비교적 어린 나이인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마흔한 살에 세상을 떠난 대무신왕 무휼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김진은 바로 그 짧은 몇 줄의 기록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신화의 시대와 역사의 시대 사이의 일을, 서로 다른 문명과 세계관의 충돌을, “부자 간의 살”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세대 간, 혹은 부모와 자식의 갈등을.
2) 시호(諡號) :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 붙여주는 호칭
“왜 내게는?” 자식을 미워했던 아버지들
고구려 왕 주몽(이미지 출처 : 한국헤밍웨이)
역사와 설화 속에서 주몽은 천신(天神) 해모수의 아들이자 수신(水神) 하백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하백의 딸이자 주몽의 어머니이며 해모수와 헤어진 후 부여의 금와왕과 다시 혼인한 유화는 농경신의 속성을 보이며 고구려와 부여 양쪽에서 시조모(始祖母)이자 태후로 모셔졌다. 금와왕의 직계 아들인 대소와 일곱 형제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친 주몽은 소서노와 혼인하고 그 지지를 받아 고구려를 세우는데,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새로운 나라인 백제를 세우는 영웅이다.
고구려 유리왕
그리고 <바람의 나라>는 자식들을 미워하는 아버지인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고국인 부여에서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들으며 자란 유리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아버지 주몽은 신과 같이 위대한 영웅이었다. 유리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부러진 칼을 가슴에 품고 고구려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유리가 마주한 것은 창업 공신이자 왕비인 소서노와 그의 두 아들이었다. 갈등 끝에 유리는 태자가 되지만, 소서노와 왕자들은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를 따르는 신하들 역시 소서노를 따른다. 자신으로 인해 ‘위대한 아버지’가 세운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목격한 유리는 평생을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를 자식들에게 투사한다. 이 콤플렉스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신수(神獸)3)다. "기린을 타고 하늘로 돌아간 주몽”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유리에게는 그와 같은 하늘의 표식이 없다. 유리는 그 하늘의 표식, 왕이 될 자의 증거가 없기에 신하들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생각하고 그 표식을 갖고 태어난 자신의 자식들을 질투하며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맏아들인 도절태자를 죽게 하고, 둘째 해명태자에게 자결을 명하고, 어린 아들 여진을 잃고, 셋째 아들 무휼을 의심한다. 딸인 세류공주를 무척 아껴 날개 달린 하늘의 신인(神人)과 혼인시켰지만, 그로 인해 신기(神氣)를 얻고 신수(神獸)를 부리게 되자 요망하다며 내친다.
3) 신수(神獸) : 특별하고 기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
다른 나라라 하여 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경우 하늘이 내린 금빛 개구리를 닮은 아이였던 아버지 금와왕과 달리, 대소와 일곱 형제에게는 하늘의 징표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자손 중 막내아들 갈사왕의 손자이자 족보를 따지자면 무휼의 처남이 되는 용과 불길한 예언을 내뱉으며 잔인한 살생을 거듭하는 채, 단 두 사람만이 하늘의 새를 거느리고 있다. 대소는 용을 총애했으나, 대소의 형제들과 조카들은 용을 질투하여 죽게 만든다. 살아남은 채는 고구려의 궁에 침입하고 그다음에는 낙랑의 왕실에 의탁하며 거듭하여 혼란을 만들어낸다.
낙랑 역시 마찬가지다. 낙랑왕 최리는 하늘의 힘을 가진 두 아들과 어여쁜 고명딸을 사랑한다고 늘 말하지만 두 아들 ‘해의 왕자’ 충과 ‘달의 왕자’ 운은 그 자체가 자명고(自鳴鼓, 스스로 우는 북)와 자명각(自鳴角, 스스로 우는 뿔피리)으로 서로 공명하며 나라를 지키는 도구일 뿐이다. 최리가 아들의 연인이었던 선우를 굳이 빼앗아 왕비로 삼은 것은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추문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버지이자 왕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권력 행사였다. 그 증거로 선우가 낳은 딸 사비(낙랑공주)는 자라는 내내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혼기가 되어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의 정략 결혼에 쓸 수 있게 되어서야 “내 사랑하는 딸”이 된다. 이들 세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은 왕이 될 재목인 자식, 하늘에 선택받은 자의 증표를 가진 자식을 질투하는 아비들과 그 아비를 두려워하거나 패배하여 목숨을 잃은 자식들의 갈등이다.
신의 세계가 인간으로, 시대 전환에 따른 충돌
'바람의나라 연' 주인공 무휼(오른쪽)(이미지 출처 : 바람의나라 홈페이지)
한 나라의 왕위를 두고 빚어지는, 어쩌면 한 가정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김진은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대유(代喩)한다.
평범한 인간인 유리왕이 신의 힘을 가진 자식들을 두려워했듯이 인간은 신을 경외하지만 질투한다. 그런 아비 밑에서 자랐기에 대무신왕 무휼 역시 하늘의 뜻을 직접 사람들에게 전하고 전설 속의 신수(神獸)들을 다스리며 죽은 이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자손들과 하늘의 표식을 이어받은 이들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송옥구나 을두지와 같은 신하들을 등용하고, 각 씨족 집단에 성씨를 내리며, 부족 연합이 아닌 왕에게 권력의 중심추를 옮겨 오며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대무신왕의 시대를 만든 것이다. 이제 큰 무당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춤을 출 권리는 오직 왕에게만 있다. 과거에 신기(神氣)를 지닌 이들이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우고, 죽은 뒤 자신의 신수(神獸)와 함께 하늘로 돌아갔다면, 이제 신기를 지닌 이들은 죽고 신이 되어서야 다음 전장의 주인공이자 호국신이 된다. 하늘의 표식을 지닌 이가 나타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람의 나라>가 말하는 부자간의 살, 세대 간의 갈등은 결국 신화의 시대가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며 벌어지는 충돌의 구체적인 양상이다. 정복 군주로서, “땅 위에서 가장 먼 곳에 깃발을 꽂겠다”는 무휼의 부도4)는 모든 사람들이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향인 “하늘 나무 위의 부도”를 그리는 아들 호동의 꿈과는 상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그중 하나다. 청룡(靑龍)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춘 무휼을 아비로, 주작(朱雀)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부여의 왕자 용을 외숙으로 하는 호동은, 고구려와 부여의 피를 잇고 봉황을 신수로 삼은 그야말로 신화 속 주인공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을 꿈꾸던 그의 의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꺾이고 무너진다. 그리고 무휼의 왕위는 호동이 아닌, 처음부터 행정가였던 자신의 아우 해색주에게 이어진다.
4) 부도(府都) :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곳(모습)을 이르는 말. ‘바람의 나라’에서 말하는 부도는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곳, 신단수가 있는 곳이다. 옛 조선의 땅인 신시이며, 작가는 이곳을 환웅과 해모수, 우리 신화의 상징적인 뿌리로 만들었다. 작가는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중간에 부도지를 한 번 인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이야기를 유사 역사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 전반에 인용된 사서들은 유사 역사학과는 거리가 멀며,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역사와 설화의 기록을 면밀히 조사하여 빈틈없이 만들어 낸 한국적인 환상 세계 위에 존재하고 있다.
'바람의 나라' 호동(이미지 출처 : SE 바람의 나라 중 발췌)
더욱이 무휼은, 고구려와 부여와 낙랑을 통틀어 하늘의 표식을 지니고 왕이 된 마지막 인물이다. 이는 죽은 차비(次妃, 둘째 왕후)의 혼이 돌아와 그의 아들인 어린 호동왕자를 지켜주고 죽은 형님 해명태자의 혼이 부여와의 전쟁에서 함께 선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신화 시대의 최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낙랑전에 참여하는데 이때는 산 형제와 죽은 신하들이 의인화된 사신이자 네 방위의 신으로 함께 진을 짜고 낙랑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고, 죽은 이들과 지상에 내려온 신들은 하늘로 돌아가고, 인간이 좀 더 신에 가까웠던 시절, “하늘 나무 위의 부도”를 꿈꾸며 봉황을 신수로 지녔던 아들 호동 역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인간들의 정쟁(政爭)에 휘말려 죽는다. 호동의 죽음 이후 더이상 죽은 이들과 하늘의 신들을 부릴 왕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온전히 인간들의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문명과 세계관의 충돌은, 고구려와 낙랑의 갈등으로 묘사된다. 고구려와 낙랑은 자신이 옛 조선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낙랑은 한(漢)의 영향을 받아 역법과 풍습을 바꾸었고, 낙랑의 왕성에는 한나라 사신들이 머무르고 있다. 소년 시절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스승인 연비 장군을 잃은 무휼은, 다시는 약하기 때문에 무릎 꿇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수십 년 뒤 그 뜻은 옛 조선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한에게 문화적으로 침식당한 낙랑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연재가 시작되고 29년, 작가는 조선의 뿌리를 이으면서도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려는 고구려와 정체성이 흐릿해진 낙랑, 그리고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는 채가 벌이는, 신화시대의 마지막 전쟁을 그리고 있다.
꾸준히 두려움 없이 새 시대에 발맞춘
'바람의 나라' 만화가 김진(이미지 출처 : 서울&)
우리 역사책 속 짧은 기록을 <바람의 나라>라는 새로운 동양적 환상 세계의 이야기로 확장해 낸 김진 작가는, 현실에서도 만화의 지면을 넘어 여러 매체로 작품 세계를 널리 확장해 나갔다. 아직 본격적인 MUG게임5)이라는 것이 없던 시대, 당시에는 아직 젊었던 김정주6). 송재경7) 대표의 비전에 공감하여 게임 <바람의 나라>를 위한 세계관과 일러스트를 제공하여 새로운 게임의 역사를 열어가는 데 힘을 보냈다. TCG8)라고 하면 미국이나 일본의 게임만 있다고 생각할 때, <바람의 나라>로 TCG를 만들고 싶다는 청년들의 시도에도 힘을 얹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김진은 그 확장된 세계가 멋대로 왜곡되거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 왔다.
5) MUG(Multi User Game) : 텍스트로 이뤄진 게임에 그래픽을 입힌 게임
6) 넥슨 창립자, 현 엔엑스씨 대표이사
7) 현 엑스엘게임즈 대표이사
8) TCG(Trading Card Game) : 트레이딩 카드 게임
뮤지컬 '바람의 나라'
원작의 제1부에 해당하는 소설 <아버지의 나라>를 직접 집필했으며, 서울예술단이 무대에 올린 두 편의 뮤지컬, <바람의 나라-호동>과 <바람의 나라-무휼>의 대본을 직접 쓰고, 공연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예술의 전당에서 무대를 지켜보았다. 다른 작가의 창작물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 이 세계관을 무단으로 차용하고 왜곡하려는 시도에 맞서 법정에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만화계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잡지가 폐간되고,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하는 가운에서도 김진 작가는 두려움 없이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유료 웹툰은 고사하고 스크롤 웹툰도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인 2003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상업적 웹툰 사이트 ‘WE6’를 만들어 모니터 비례에 맞춘 형태의 웹 연재를 시도하고, 이후에도 e-book 형태로 연재를 계속했다. 그는 담기는 그릇은 바뀌었을지라도 꾸준하게,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다. 마치 땅 위에서 가장 먼 곳에 깃발을 꽂겠다는 무휼처럼, 한국 만화의 새로운 역사를 계속 만들어가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전혜진
SF 작가, 만화 스토리 작가. 2007년 만화 잡지 『이슈』를 통해 라이트노벨 『월하의 동사무소』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레이디 디텍티브』와 『리베르떼』, 『PermIT!!!』 등의 만화와 『족쇄: 두 남매 이야기』, 『자살 클럽』,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 등의 소설과 에세이집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을 펴냈음. SF 단편집 『홍등의 골목』과 앤솔로지 『다행히 졸업』, 『텅 빈 거품』, 『감겨진 눈 아래에』, 『살을 섞다』, 『5월 18일, 잠수함 토끼 드림』 등에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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