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적이고 불편한 유토피아
플라톤(Plato)의 ‘철학자 국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몽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의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그리고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몽상가들(The Dreamers, 2003)>이라는 영화 속 ‘욕망의 유토피아’ 등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불행히도 이 모든 논의들이 종종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글자 그대로 몽상적 사회주의든 과학적 사회주의든 욕망의 유토피아든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몽상적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이미 우리가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유토피아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는, 혹은 누군가에게 유토피아가 다른 이들에게는 디스토피아일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역설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유토피아라는 공상적으로 들리는 개념보다는 ‘사람이 살만한 세상 또는 나라’라는 현실적인 용어를 선호하게 된다. 물론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는 긍정적 역할도 하지만 말이다.
현실적 유토피아를 그린 두 명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
그러나 사람이 살만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므로 차라리 소박하게,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를 ‘현실주의적’으로 논의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들은 현실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역시 몽상가였다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두 사상가는 가장 현실적인 ‘유토피아, 또는 사람이 살 만한 나라’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해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적 정의’가 중요함을 역설했고,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와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둘 다 ‘몽상적’이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경제적 이익에 앞선 ‘도덕성’을 그토록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방임주의 사상에는 놀랍게도 분배적 정의 개념이 삭제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이 두 사상가를 각각의 색채를 지닌 ‘진정한 현실주의자’로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분배적 정의는 돈과 부 등 경제적 자원뿐만 아니라 형벌, 지위, 권력, 명예, 자기보존 등 다양한 차원에서의 공정한 분배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은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가치로 간주되는 평등의 다른 이름이다. 혹은 많이 인용되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적극적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그러나 놀랍게도 사실 그는 적극적 자유를 옹호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분배적 정의는 일체의 불평등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인 평등은 물론 아니지만, ‘같은 경우들은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평등의 계명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적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허용할 수 있는 불평등의 정도는 어느 수준일까? 사실 이 질문은 대답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분배적 정의에서 허용하는 불평등 역시 어떤 동등성의 원리에 따라, 즉 ‘평등한 방식으로’ 관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예를 들어, 최저임금, 그리고 대학등록금, 또는 국민연금 수준을 어떻게 책정하는 것이 분배적 정의에 부합한 것인지 질문받는다면 매우 당혹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무대를 근대사회로 바꾸어 애덤 스미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했을 것인가? 아마도 애덤 스미스는 더 당혹해할 것 같다. 그의 이론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기본적인 삶의 안정성을 ‘최소한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입한다는 사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경쟁을 통해, 혹은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즉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교환적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말 이외에 애덤 스미스가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의 유토피아’는 오늘날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를 통해 가장 ‘현실적인 정치이론’으로 다시 등장한다. 노직은 국가가 보험증서를 살 수 없는 사람들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사적단체(예를 들면 보험회사)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애덤 스미스를 인용하며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국가는 사실상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최근 오바마 케어가 1심에서 위헌 판결을 받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다.
모두의 유토피아를 위한 평등
자살률, 노인 빈곤율, 빈부격차, 출산율 등, 부정적인 지수가 OECD 국가들 중 최상위 수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년은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빈곤과 차별, 기회 박탈, 그리고 그로 인한 자존감의 추락과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자존감 있는 삶,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완벽한 평등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예를 들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푸리에나 생시몽의 공상주의 사회가 매혹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제도적 정비를 통해 ‘기본적 재화’(존 롤즈(John Rawls))를 박탈당한 사람에게 분배적 정의의 원칙에 따라 그것을 되돌려주는 일일 것이다. 롤즈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본적 재화에 ‘기본적 권리들과 자유들, 스스로 책임을 지는 직책(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 기본 수입과 부,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 등을 포함시킨다.
▲ 미국의 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와 그의 저서 『정의론』 ⓒ이학사.
그는 그의 저서 『정의론』을 통해 자유주의적 이론 체계 속에 사회주의적 요구를 통합한 자유주의적 평등의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롤즈가 모든 사람이 책임성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직업 또는 직책, 그리고 적절한 수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들을 자존감과 연결시킨다는 점이 눈에 띈다. 빈곤, 기회의 박탈은 물질적 삶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파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고통과 절망을 없애려면 한정적인(그러나 우리나라 수준에서 양적 측면에 있어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기본적 재화들을 가능한 한 많이, 아니 조금만이라도 더 공정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인 나라’가 다른 더 많은 누구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도록 좀 더 마음을 열고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홍준기 정신분석 이론과 임상, 현대유럽철학 및 정치경제•사회사상 등의 분야에 특히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경상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사회적 국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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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적이고 불편한 유토피아
플라톤(Plato)의 ‘철학자 국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몽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의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그리고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몽상가들(The Dreamers, 2003)>이라는 영화 속 ‘욕망의 유토피아’ 등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불행히도 이 모든 논의들이 종종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글자 그대로 몽상적 사회주의든 과학적 사회주의든 욕망의 유토피아든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몽상적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이미 우리가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유토피아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는, 혹은 누군가에게 유토피아가 다른 이들에게는 디스토피아일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역설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유토피아라는 공상적으로 들리는 개념보다는 ‘사람이 살만한 세상 또는 나라’라는 현실적인 용어를 선호하게 된다. 물론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는 긍정적 역할도 하지만 말이다.
현실적 유토피아를 그린 두 명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
그러나 사람이 살만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므로 차라리 소박하게,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를 ‘현실주의적’으로 논의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들은 현실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역시 몽상가였다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두 사상가는 가장 현실적인 ‘유토피아, 또는 사람이 살 만한 나라’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해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애덤 스미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적 정의’가 중요함을 역설했고,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와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둘 다 ‘몽상적’이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경제적 이익에 앞선 ‘도덕성’을 그토록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방임주의 사상에는 놀랍게도 분배적 정의 개념이 삭제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이 두 사상가를 각각의 색채를 지닌 ‘진정한 현실주의자’로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분배적 정의는 돈과 부 등 경제적 자원뿐만 아니라 형벌, 지위, 권력, 명예, 자기보존 등 다양한 차원에서의 공정한 분배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은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가치로 간주되는 평등의 다른 이름이다. 혹은 많이 인용되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적극적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그러나 놀랍게도 사실 그는 적극적 자유를 옹호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분배적 정의는 일체의 불평등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인 평등은 물론 아니지만, ‘같은 경우들은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평등의 계명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적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허용할 수 있는 불평등의 정도는 어느 수준일까? 사실 이 질문은 대답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분배적 정의에서 허용하는 불평등 역시 어떤 동등성의 원리에 따라, 즉 ‘평등한 방식으로’ 관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예를 들어, 최저임금, 그리고 대학등록금, 또는 국민연금 수준을 어떻게 책정하는 것이 분배적 정의에 부합한 것인지 질문받는다면 매우 당혹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무대를 근대사회로 바꾸어 애덤 스미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했을 것인가? 아마도 애덤 스미스는 더 당혹해할 것 같다. 그의 이론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기본적인 삶의 안정성을 ‘최소한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입한다는 사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경쟁을 통해, 혹은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즉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교환적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말 이외에 애덤 스미스가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의 유토피아’는 오늘날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를 통해 가장 ‘현실적인 정치이론’으로 다시 등장한다. 노직은 국가가 보험증서를 살 수 없는 사람들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사적단체(예를 들면 보험회사)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애덤 스미스를 인용하며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국가는 사실상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최근 오바마 케어가 1심에서 위헌 판결을 받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다.
모두의 유토피아를 위한 평등
자살률, 노인 빈곤율, 빈부격차, 출산율 등, 부정적인 지수가 OECD 국가들 중 최상위 수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년은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빈곤과 차별, 기회 박탈, 그리고 그로 인한 자존감의 추락과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자존감 있는 삶,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완벽한 평등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예를 들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푸리에나 생시몽의 공상주의 사회가 매혹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제도적 정비를 통해 ‘기본적 재화’(존 롤즈(John Rawls))를 박탈당한 사람에게 분배적 정의의 원칙에 따라 그것을 되돌려주는 일일 것이다. 롤즈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본적 재화에 ‘기본적 권리들과 자유들, 스스로 책임을 지는 직책(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 기본 수입과 부,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 등을 포함시킨다.
▲ 미국의 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와 그의 저서 『정의론』 ⓒ이학사.
그는 그의 저서 『정의론』을 통해 자유주의적 이론 체계 속에 사회주의적 요구를 통합한 자유주의적 평등의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롤즈가 모든 사람이 책임성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직업 또는 직책, 그리고 적절한 수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들을 자존감과 연결시킨다는 점이 눈에 띈다. 빈곤, 기회의 박탈은 물질적 삶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파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고통과 절망을 없애려면 한정적인(그러나 우리나라 수준에서 양적 측면에 있어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기본적 재화들을 가능한 한 많이, 아니 조금만이라도 더 공정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인 나라’가 다른 더 많은 누구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도록 좀 더 마음을 열고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홍준기
정신분석 이론과 임상, 현대유럽철학 및 정치경제•사회사상 등의 분야에 특히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경상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사회적 국가』 등을 썼다.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4&cid=2363680 <누구나 살만한 세상은 존재하는가?>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