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1가 즐겨 말했듯 ‘역사는 그 시대의 자식’이다. 과거는 지나간 사실로써 고정되어 있으나 역사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선별되고 또 변화하기 때문이다. E.H. 카(Edward Hallett Carr)가 ‘한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라고 언급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현재 역사가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은 현시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역사학이 고리타분한 암기 과목 정도로만 여겨졌던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위상 변화는 역사를 다루는 입장에서 퍽 반가운 일이다. 최소한 이제 역사의 효용성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2와 같은 출처 불명의 격언을 애써 꺼내 올 필요는 없어 보인다.
1 프랑스의 근대사학자
2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아 출처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공감과 위안만을 위한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
그럼에도 현재의 대중적 역사 서술이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데 충분한가 자문해본다면 고개를 젓게 된다. 역사가 효용성을 지니는 이유는 사회와 그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역사 서술의 상당수는 가능한 단순한 서술을 통해 공감과 위안을 전하는데 주력하는 듯하다. 물론 공감과 위안을 주는 것 또한 역사의 주요한 기능이며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지탱해주기도 하나 영국의 전쟁사학자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가 말했듯 그것은 보육원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 공감과 위안을 주는 것 또한 역사의 주요한 기능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대부분 민족주의에서 그 정당성을 구하곤 한다. 일찍이 에르네스트 르낭(Joseph-Ernest Renan)3을 필두로 하는 여러 학자들이 민족에 대해 18세기 후반에 창조된 문화적 가공물로 규명한 바 있으나 여전히 민족은 공동체의 최초의 정체성으로서 작용한다. 특히 한반도처럼 오랜 기간 통일된 왕조를 유지한 경우 민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오래된 패러다임을 이야기해보자.
3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종교사가·언어학자
‘우리는 이 땅에서 반만년 간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며 특유의 단결과 근성의 DNA를 지니고 자랐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침략 행위 없이 단일 민족의 정체성을 고수해온 위대한 한민족이다.’
후천적 획득형질이 유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현대 생물학의 상식은 일단 접어두자.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문제점이 많은 문구이다. 당장 반 만년 역사는 《동국통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기는 하나 일본의 황기(신화적 인물인 진무 덴노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하는 기년법)와 마찬가지로 실증적 증거가 전무하다. 침략 행위가 없었다는 서술 또한 여진족의 마을을 모두 불태워 빈터로 만들고 그 모습이 보기에 장쾌했다고 말하는 《선조실록》의 기록만으로 쉽게 반박된다. 단일민족의 자부심 또한 한(韓)족 및 예맥, 거란, 말갈 등이 모인 다민족 다문화 연합체였던 고구려의 역사를 부정할 때에야 그나마 성립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세의 격문과도 같은 위의 구호는 지금까지도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민족주의적 역사는 쉽고 간편하다는 점에서 ―특히 시장경제적 측면에서―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킨다. 그렇기에 르낭의 견해를 다시 한 번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망각하는 것, 심지어 역사를 잘못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민족 형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고,
이것이 바로 역사 연구의 진보가 종종 민족을 위협하게 되는 이유이다.”
-에르네르트 르낭 《민족이란 무엇인가》 중
만약 1947년에 인도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이 5,000년 역사를 운운한다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의 만행을 은폐한 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희생만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분노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호소는 실제로 존재하며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 민족이라는 폐쇄적 세계관 내에는 이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에 우리 또한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민족과 타민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역사 인식은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역사에서 배우는 민족주의의 위험
신화가 된 역사는 질 나쁜 반지성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4이 경고했듯 역사는 핵물리학이 그러한 것처럼 실질적인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20세기의 역사는 민족주의가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이 언제나 이슬람에게 핍박받아왔음을 내세우며 발칸 반도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제2의 로마제국을 외치며 국민들을 파시즘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은 “우리 이슬람 민족은 80년 넘게 똑같은 굴욕과 수치를 맛보았다. 우리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렸으며, 신성은 모독당했다.”라고 말하며 9.11테러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비극이 온전히 민족주의 탓이라 말하는 건 부당하겠으나 민족주의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4 영국의 역사학자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최고의 역사학자로 꼽는 인물이다.
▲ 민족주의는 독재, 파시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된다.
한편 폭력을 소수 권력자의 일탈로 치부하는 것 또한 곤란하다. “우리는 600년 전에 멈춘 곳에서 시작한다.”라고 선언하며 게르만 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추구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권력을 쥐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독일 대중이었다.
때문에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지는 수준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역사를 통해 명확한 답을 찾길 원하고 ―이 글을 쓰는 필자를 포함한― 역사가 또한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신화에 저항하고 또 역사의 양태가 복잡함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반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를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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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2&cid=2365384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1가 즐겨 말했듯 ‘역사는 그 시대의 자식’이다. 과거는 지나간 사실로써 고정되어 있으나 역사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선별되고 또 변화하기 때문이다. E.H. 카(Edward Hallett Carr)가 ‘한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라고 언급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현재 역사가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은 현시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역사학이 고리타분한 암기 과목 정도로만 여겨졌던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위상 변화는 역사를 다루는 입장에서 퍽 반가운 일이다. 최소한 이제 역사의 효용성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2와 같은 출처 불명의 격언을 애써 꺼내 올 필요는 없어 보인다.
1 프랑스의 근대사학자
2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아 출처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공감과 위안만을 위한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
그럼에도 현재의 대중적 역사 서술이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데 충분한가 자문해본다면 고개를 젓게 된다. 역사가 효용성을 지니는 이유는 사회와 그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역사 서술의 상당수는 가능한 단순한 서술을 통해 공감과 위안을 전하는데 주력하는 듯하다. 물론 공감과 위안을 주는 것 또한 역사의 주요한 기능이며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지탱해주기도 하나 영국의 전쟁사학자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가 말했듯 그것은 보육원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 공감과 위안을 주는 것 또한 역사의 주요한 기능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대부분 민족주의에서 그 정당성을 구하곤 한다. 일찍이 에르네스트 르낭(Joseph-Ernest Renan)3을 필두로 하는 여러 학자들이 민족에 대해 18세기 후반에 창조된 문화적 가공물로 규명한 바 있으나 여전히 민족은 공동체의 최초의 정체성으로서 작용한다. 특히 한반도처럼 오랜 기간 통일된 왕조를 유지한 경우 민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오래된 패러다임을 이야기해보자.
3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종교사가·언어학자
‘우리는 이 땅에서 반만년 간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며 특유의 단결과 근성의 DNA를 지니고 자랐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침략 행위 없이 단일 민족의 정체성을 고수해온 위대한 한민족이다.’
후천적 획득형질이 유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현대 생물학의 상식은 일단 접어두자.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문제점이 많은 문구이다. 당장 반 만년 역사는 《동국통감》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기는 하나 일본의 황기(신화적 인물인 진무 덴노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하는 기년법)와 마찬가지로 실증적 증거가 전무하다. 침략 행위가 없었다는 서술 또한 여진족의 마을을 모두 불태워 빈터로 만들고 그 모습이 보기에 장쾌했다고 말하는 《선조실록》의 기록만으로 쉽게 반박된다. 단일민족의 자부심 또한 한(韓)족 및 예맥, 거란, 말갈 등이 모인 다민족 다문화 연합체였던 고구려의 역사를 부정할 때에야 그나마 성립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세의 격문과도 같은 위의 구호는 지금까지도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민족주의적 역사는 쉽고 간편하다는 점에서 ―특히 시장경제적 측면에서―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킨다. 그렇기에 르낭의 견해를 다시 한 번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망각하는 것, 심지어 역사를 잘못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민족 형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고,
이것이 바로 역사 연구의 진보가 종종 민족을 위협하게 되는 이유이다.”
-에르네르트 르낭 《민족이란 무엇인가》 중
만약 1947년에 인도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이 5,000년 역사를 운운한다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의 만행을 은폐한 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희생만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분노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호소는 실제로 존재하며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 민족이라는 폐쇄적 세계관 내에는 이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에 우리 또한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민족과 타민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역사 인식은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역사에서 배우는 민족주의의 위험
신화가 된 역사는 질 나쁜 반지성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4이 경고했듯 역사는 핵물리학이 그러한 것처럼 실질적인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20세기의 역사는 민족주의가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이 언제나 이슬람에게 핍박받아왔음을 내세우며 발칸 반도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제2의 로마제국을 외치며 국민들을 파시즘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은 “우리 이슬람 민족은 80년 넘게 똑같은 굴욕과 수치를 맛보았다. 우리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렸으며, 신성은 모독당했다.”라고 말하며 9.11테러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비극이 온전히 민족주의 탓이라 말하는 건 부당하겠으나 민족주의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4 영국의 역사학자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최고의 역사학자로 꼽는 인물이다.
▲ 민족주의는 독재, 파시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된다.
한편 폭력을 소수 권력자의 일탈로 치부하는 것 또한 곤란하다. “우리는 600년 전에 멈춘 곳에서 시작한다.”라고 선언하며 게르만 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추구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권력을 쥐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독일 대중이었다.
때문에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지는 수준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역사를 통해 명확한 답을 찾길 원하고 ―이 글을 쓰는 필자를 포함한― 역사가 또한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신화에 저항하고 또 역사의 양태가 복잡함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반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를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2&cid=2365384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