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인문 플랫폼 인문360과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문학[모험]모험의 속도와 방향을 바꾸다

2021-04-12

소설에 있어서는 평범한 모든 이야기가 모험이 되어 버린다. 우연과 필연의 그물망 안에서 삶은 하루하루가 어떤 격동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모험이라 할 수 있다. 『해리포터』에서 주인공 해리 포터의 일상은 킹스크로스를 지나면서 모험으로 바뀌지만, 호그와트에 입학 후의 그 모험은 차라리 일상에 가깝다. 모험과 모험이 이어지는 삶에서, 그것을 딱히 모험이라 부를 필요가 있을까?
모험은 또다른 모험을 불러오고, 또 모험을 통해 해결되기도 한다. 모험 소설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톰 소여의 모험』에서 미시시피의 소년들은 모험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모험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어른들의 세계를 풍자하는 데에서 남다를 지점이 생겨난다. 또한 영국의 문장이 아닌 미국의 구어로 쓰인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은 이러한 모험적 시도를 일상적으로 시도한 결과,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 『톰 소여의 모험』 마크 트웨인 지음, 민음사 / 『토지』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톰 소여의 모험』 마크 트웨인 지음, 민음사 / 『토지』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한국문학에서 모험은 보다 현실적인 감각에 밀착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일제에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최참판 댁은 하나 남은 혈통인 서희의 계획 하에 만주 용정으로의 모험을 떠난다. 그것은 개인의 모험이 아닌, 집단의 모험이었으며, 크게는 민족의 모험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험은 어쩌면 일제 강점기에 피치 못하게 내몰린, 강제된 일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보편성을 구현하고 총체성을 지향하는 소설에서 모험이라는 일탈은 최대한 축소되기 마련이다. 모든 모험은 인간의 삶과 진실이라는 필연성에 묻히기 십상이다. 소설에서 인간의 삶이란 거의 모두 모험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책을 통해 모험을 체험하기에는 소설보다는 수기나 에세이가 더 알맞다. 소설적 인과 관계로 귀결되지 않는 개인의 체험은 그 자체로서 일탈로 기능하고, 모험으로 존재한다. 모험은 실재한다. 픽션의 세계가 아닌 논픽션의 세계에서.

 


  • 『느링느링 해피엔딩』 볼프 퀴퍼 지음, 북라이프 / 원작 『Eine Million Minuten』 (아이네 밀리온 미누텐)『느링느링 해피엔딩』 볼프 퀴퍼 지음, 북라이프 / 원작 『Eine Million Minuten』 (아이네 밀리온 미누텐)


볼프 퀴퍼의 『느링느링 해피엔딩』은 모험으로 충만한 책이다. 유엔 감시관이자 곧 대학 교수에 임용될 예정자인 퀴퍼는 성공을 향한 모험에 몸을 싣는다. 그는 세계를 떠돌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두둑한 연봉을 받으며, 성공한 학자이자 가장이 된다. 이 모든 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하루, 한 시간, 일 분이 그에게는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만일 그에게 딸 나나가 없었다면, 그의 삶은 방향과 속도의 변화 없이 그저 지속되었을 것이다.
나나는 근육실조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희귀병으로 인한 장애 앞에 아빠인 퀴퍼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다. 성공 가도를 앞둔 채 일시정지. 모험가 체질인 그는 처음에는 딸의 속도에 영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윽고 퀴퍼는 모험의 방향과 속도를 바꾸기로 한다. 신발을 다 신기까지 거의 4분이 걸리고, 빵 한쪽을 먹는 데 19분이 걸리고, 걸을 때마다 너무 많이 넘어지는 아이의 속도에 맞추기로. 백만 분의 시간을 갖기로.
그와 그의 가족은 백만 분의 시간의 여행을 떠난다. 모든 여행이 모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휴양지에서의 독서, 면세점에서의 쇼핑, 호텔에서의 미식을 모두 모험이라 부르기엔 조금 겸연쩍다. 그러나 퀴퍼 가족의 여행은 다르다. 그들 부부에게는 장애를 가진 딸이 있고, 이제 막 태어나 두발로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막내아들이 있다. (이것이 모험이 아니라면 무엇이 모험이겠는가!) 그들은 독일의 집을 떠나, 약간의 재산을 처분하고, 동남아시아와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백만 분의 시간을 보낸다.

 


  • 여행지에서의 퀴퍼와 나나 가족 사진 01
  • 여행지에서의 퀴퍼와 나나 가족 사진 02
  • 여행지에서의 퀴퍼와 나나 가족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질적인 문화에 부딪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모험을 모험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은 지나가고 어떤 모험이든 결국은 끝이 있다는 점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백만 분의 시간이 다 갔을 때, 퀴퍼는 딸 나나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가족 모두 더 강한 개인이 되었고, 더 부드러운 가족이 되었다. 모험 중에 보이는 이들의 가족애는 여행이라 부르는 모험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선물처럼 보인다. 낯선 곳에 외따로 떨어져, 각자에게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더 이상 바쁜 일상은 없고, 서로의 목소리와 말뜻에 더 길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 이것을 모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모험이라면 언제든 떠나고만 싶다.
책에서 퀴퍼는 직장에 매인 한국인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급작스레 여행을 떠난다. 모험의 시작은 그런 용기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한참을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검색만 하다 잠이 들었다. 내일은 출근이라는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모험의 속도와 방향을 함부로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느링느링 해피엔딩』의 따뜻한 기운을 받는 것은 쉬울 것이다. 만약 책으로 모험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서효인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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