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인문 플랫폼 인문360과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문학[변화]수많은 길에서 시작된 마땅한 변화

2021-04-14
또 하나의 변화


변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 사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는 주체의 능동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변하다’가 어쩌다 보니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됨을 뜻한다면, ‘변화하다’는 스스로 어떤 상황이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함을 이르는 말일 테다. 인류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진화 이후의 문명을 만들어왔다.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주거의 모습이 변화하였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을 통해 사회 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진보는 거의 모든 변화를 긍정한다. 진보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변화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변화를 독려하고 주도한다.

 

최근 가장 강력하고 밀도 높은 변화는 페미니즘에서 비롯되고 있다. 성추행‧성폭행 피해 사실을 드러내며, 가해자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는 ‘미투’ 운동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누군가는 더 이상 우리가 변할 필요는 없다고 쉽게 일갈한다. 어느 누군가는 너무나 성급한 움직임이라고 함부로 논평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이쯤이면 됐다는 말, 이제 그만하라는 말 따위를 최대한 힘껏 무시하는 데에서 추동되었을 것이다. 많은 것이 변해 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 분명한 우리의 역사에서 이제 여성 혐오와 젠더 폭력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고, 이참에 완전히 끝나야만 한다. Time's Up, 시간이 된 것이다.

 

 『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밝은세상
▲ 『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밝은세상

 


따로 또 같이 걷는 길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래티샤 콜롱바니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세 갈래 길』은 페미니즘의 도도한 흐름이 한국 여성이 유별나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캐나다의 몬트리올. 그곳에는 인종, 계급, 나이, 성격 그 모든 게 완연히 다른 세 여성이 있다. 우타르프라데시의 스미타는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계급의 똥을 손수 치우는 일로 연명해야 한다. 시칠리아의 줄리아는 가부장의 보호 아래서 사랑을 제한받고, 희생을 강요당한다. 몬트리올의 사라는 유리천장을 깨뜨리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다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병으로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그들이지만 여성으로서 삶은 놀랍도록 서로 닮았다. 그들은 같은 이유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내쳐진다. 스미타는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이어 내려온 운명의 족쇄를 자신의 딸에게는 채우지 않으려 한다. 줄리아는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졌어야 할 가업을 나서서 이어받는다. 그리고 시크교도 남자와의 사랑을 지키려 한다. 사라는 직장에서의 인정, 경제적 풍요, 사회적 존중이라는 외피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서의 존재를 드디어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소설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 세 갈래 길은 ‘여성의 삶’이라는 하나의 길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된다.

 

수많은길에서시작된마땅한변화

 

 

그들의 결심, 그들의 의지, 그들의 용기는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나아가 사회와 세계의 변화를 이끌 것이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의 모순과 폭력은 타파될 것이다. 가부장이라는 이름의 편견은 해소될 것이다. 인종이라는 이름의 차별은 철폐될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름의 한계는 지워질 것이다. 이것들을 일컬어 진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것은 해일 앞의 조개가 아닌 파도 자체이며 이미 해일만큼 거대하다. 각종 성범죄의 피해자, 권력과 위계에 의한 성적 폭력에 방치되었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바로 파도이며 해일이다. 각자 고립된 자리에서 자신을 책망하던 피해 여성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냄으로써 하나의 길 위에서 만났다. 그것은 폭력이었다고, 그 일은 강간이었다고, 몹쓸 짓이 아닌 범죄라고 말한다. 지금 이후로 우리는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 마땅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앞에서 제대로 된 인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여기 살아 있어. 그래, 오늘 이렇게 살아 있어.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 있을 거야.’

–래티샤 콜롱바니, 『세 갈래 길』중에서


서효인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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