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이다.
-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여성은 정조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은 조혼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1920년대 물밀 듯 밀려온 ‘자유연애’의 밝은 측면이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조혼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쪽은 오직 남성뿐이었다. 신여성은 남성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자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있었지만, 자유연애의 기쁨을 누린 것은 대부분 기혼 남성이었다. 그들은 전통사회의 관습에 따라 이미 조혼한 상태였고, 고향에 아내를 둔 채 떠난 일본 유학에서 신여성과 사랑에 빠져 자유연애를 향한 열정에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은 데이트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사과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뭇 남성들의 질타와 무시의 대상이 되어 평생 오명을 벗지 못했고, 조선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의 절친한 벗이자 소설가였던 김일엽은 일본인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그와 결혼하지 못하고 오랜 방황 끝에 승려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김일엽과 나혜석은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며 여성의 해방과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랑을 꿈꾸었지만, 그들 앞에 놓인 미래는 너무나 험난하고 파란만장했다.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김일엽, 〈나의 정조관〉(1927년 1월 8일 조선일보)
나혜석과 김일엽, 김명순 등 당대 대표적인 신여성들에게 자유연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성의 해방과 주체적인 삶’을 위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남성들은 연애 대상으로서의 신여성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페미니스트로서의 신여성에게는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왜 남성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정조를 여성에게만 요구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하여 나혜석은 매우 단호한 문체로 일갈하였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이다.”라는 선언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매우 파격적인 도발이었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정조를 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직 본인의 자유의지로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녀는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게다가 이것이 나혜석 본인의 떠들썩한 연애 사건(유부남 최린과의 관계)으로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한 이후 나온 글인지라 더욱 세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표 신여성 나혜석의 자유연애
▲ 나혜석 ⓒ한국콘텐츠진흥원 컬처링, (사)한국여성연구소
신여성 중 나혜석만큼 파란만장한 ‘사랑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혜석은 자유연애가 막 신여성의 상징이 되어가던 무렵,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수많은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여고 시절부터 신문 지상에 오르내릴 만큼 모두에게 주목받는 인재였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글솜씨와 학업 성적도 뛰어났지만, 집에서는 ‘빨리 결혼을 해라, 여자는 모름지기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괴로워했다.
이런 나혜석의 괴로움을 생생하게 반영한 작품이 바로 단편소설 〈경희〉다. 일본 유학 중이던 경희는 잠깐 집에 머물며 휴식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만, ‘결혼해야 한다’는 부모의 압박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럼에도 ‘나만의 길, 주체적인 여성의 길’을 걷고 싶다는 열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괴로워한다. 부모에게 실망을 주는 딸도 되고 싶지 않고, 학업을 게을리하고 싶지도 않으며, 예술가로서의 꿈도 버리고 싶지 않은 그녀에게 조혼의 압박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정체성의 위협이 된다. 경희는 자유연애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지배나 통제도 받지 않는 상태,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는 길을 꿈꾼다. 이것은 나혜석뿐 아니라 당시 수많은 신여성들이 꿈꾸었던 자유와 해방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 화가이자 조선 최초로 대규모 서양화 전시회를 열었던 눈부신 신여성 나혜석에게조차 자유연애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고 시절부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수많은 연애편지를 읽으며 자신은 그런 열정적인 마음에 화답할 수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그녀의 진정한 꿈은 멋진 남자와의 동화 같은 연애와 결혼이 아니라 화가로서의 무한한 성장과 예술가로서의 독립이었다.
좀처럼 남성에게 의미 있는 눈길을 보내지 않았던 나혜석에게 드디어 운명처럼 찾아온 첫사랑은 촉망받는 유학생, 최승구였다. 동경 유학 시절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공교롭게도 최승구 역시 기혼이었다. 그에게는 조혼한 아내가 있었다. 자유연애 과정에서 ‘신여성 vs 기혼남성(조혼)’의 구도는 흔했고, 여성은 항상 불리한 입장이었다. 신여성은 미혼에 한창 공부하는 학생이거나 꿈많은 젊은 여성인 반면, 상대는 조혼한 아내와 자식을 고향에 두고 있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이다. 남성들은 의무감으로 고향의 아내에게도, 자유연애 대상인 신여성에게도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는 남성은 흔치 않았다.
남성들은 대부분 신여성과의 자유연애에서 오는 장점(자유와 해방, 정서적이고 지적인 만족감)과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 모두를 누렸고, 신여성들은 결국 버려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결코 그런 길을 원하지 않았던 최승구는 감정적인 유대가 전혀 없는 아내와 이혼하고 싶어 했으나 이혼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폐병에 걸리고 만다. 나혜석은 아버지의 거듭된 외도와 축첩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아픔을 보았기에 자신은 결코 다른 여성에 대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혜석에게 최승구는 첫사랑이었고, 최승구는 폐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애타게 나혜석을 찾았다.
최승구의 형이 아우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나혜석에게 전보를 쳤을 때, 마침 학교에서 중요한 시험을 준비 중이던 나혜석은 갈등을 느끼지만 전보에 담긴 사연의 급박함을 이해하고 어렵사리 최승구의 고향을 찾아간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나혜석을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어 했던 최승구는 그녀를 보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한다. 나혜석은 최승구가 반드시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간호를 하다가 시험 때문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고,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최승구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듣게 된다.
진정한 자유연애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나혜석은 쇼크 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이 제대로 간호를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다가 훗날 남편이 될 김우영을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렸던 최승구와의 연애와 달리, 김우영과의 연애는 처음에는 일방적이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집안에서 계속되는 결혼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김우영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남성에게 모든 주도권을 양보할 나혜석이 아니었다. 당시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내건 ‘결혼 계약’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혼인계약서라는 것을 쓰는 사람도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서약이 오직 ‘남성이 여성에게 지켜야 할 약속들’이라는 것이 더욱 파격적이었다.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요구한 결혼 서약은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연애와 결혼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요구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혼 후 이혼한 과거가 있는 김우영의 전처가 낳은 딸을 자신이 키우지 않겠다는 내용, 시집살이를 결코 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데 어떤 방해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 그리고 지금처럼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철저히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달라는 선언이었다.
▲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컬처링, (사)한국여성연구소
게다가 그녀의 신혼여행지 또한 상상을 뛰어넘는 장소였다. 결혼 며칠 전까지 신혼여행 장소를 남편 김우영조차 몰랐다. 일단 김우영에게는 신혼여행지 결정권이 없었다. 어디로 신혼여행을 갈지 철저히 비밀로 하다가, 결국 결혼 당일 밝혀진 신혼여행지는 놀랍게도 ‘첫사랑의 무덤’이었다. 첫사랑 최승구가 묻힌 장소로 신혼여행을 가자는 이 도발적인 제안을 김우영은 받아들인다. 그만큼 나혜석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비석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초라한 무덤 앞에서 나혜석은 최승구와 나눈 편지를 모두 태우고, 최승구와 진정한 작별 인사를 나누며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연애와 결혼을 감행했던 나혜석은 결국 최린과의 연애 사건 이후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고 아이들도 만나지 못한 채 평생 전국을 떠도는 비극적인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신여성과 자유연애는 싱그러운 첨단의 유행을 떠올리게 하는 참신한 기표였지만, 그 기표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여성들은 결코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도 여성들은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가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토킹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심각한 남녀차별의 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어떤 남성 앞에서나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도 어렵지만,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험난한 투쟁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자유연애가 가능하려면 우선 여성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 나아가 여성 자신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여성은 예뻐야 하고, 다소곳해야 하고, 싹싹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싸우는 여성들, 남성의 재력이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가꾸려는 여성들, ‘연애하지 않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여성들의 용기에 더욱 큰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진정한 자유연애는 과연 언제쯤 시작될 수 있을까.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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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7&cid=2355919 <신여성과 자유연애>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이다.
-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여성은 정조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은 조혼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1920년대 물밀 듯 밀려온 ‘자유연애’의 밝은 측면이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조혼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쪽은 오직 남성뿐이었다. 신여성은 남성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자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있었지만, 자유연애의 기쁨을 누린 것은 대부분 기혼 남성이었다. 그들은 전통사회의 관습에 따라 이미 조혼한 상태였고, 고향에 아내를 둔 채 떠난 일본 유학에서 신여성과 사랑에 빠져 자유연애를 향한 열정에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은 데이트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사과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뭇 남성들의 질타와 무시의 대상이 되어 평생 오명을 벗지 못했고, 조선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의 절친한 벗이자 소설가였던 김일엽은 일본인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그와 결혼하지 못하고 오랜 방황 끝에 승려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김일엽과 나혜석은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며 여성의 해방과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랑을 꿈꾸었지만, 그들 앞에 놓인 미래는 너무나 험난하고 파란만장했다.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김일엽, 〈나의 정조관〉(1927년 1월 8일 조선일보)
나혜석과 김일엽, 김명순 등 당대 대표적인 신여성들에게 자유연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성의 해방과 주체적인 삶’을 위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남성들은 연애 대상으로서의 신여성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페미니스트로서의 신여성에게는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왜 남성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정조를 여성에게만 요구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하여 나혜석은 매우 단호한 문체로 일갈하였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이다.”라는 선언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매우 파격적인 도발이었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정조를 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직 본인의 자유의지로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녀는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게다가 이것이 나혜석 본인의 떠들썩한 연애 사건(유부남 최린과의 관계)으로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한 이후 나온 글인지라 더욱 세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표 신여성 나혜석의 자유연애
▲ 나혜석 ⓒ한국콘텐츠진흥원 컬처링, (사)한국여성연구소
신여성 중 나혜석만큼 파란만장한 ‘사랑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혜석은 자유연애가 막 신여성의 상징이 되어가던 무렵,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수많은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여고 시절부터 신문 지상에 오르내릴 만큼 모두에게 주목받는 인재였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글솜씨와 학업 성적도 뛰어났지만, 집에서는 ‘빨리 결혼을 해라, 여자는 모름지기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괴로워했다.
이런 나혜석의 괴로움을 생생하게 반영한 작품이 바로 단편소설 〈경희〉다. 일본 유학 중이던 경희는 잠깐 집에 머물며 휴식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만, ‘결혼해야 한다’는 부모의 압박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럼에도 ‘나만의 길, 주체적인 여성의 길’을 걷고 싶다는 열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괴로워한다. 부모에게 실망을 주는 딸도 되고 싶지 않고, 학업을 게을리하고 싶지도 않으며, 예술가로서의 꿈도 버리고 싶지 않은 그녀에게 조혼의 압박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정체성의 위협이 된다. 경희는 자유연애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지배나 통제도 받지 않는 상태,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는 길을 꿈꾼다. 이것은 나혜석뿐 아니라 당시 수많은 신여성들이 꿈꾸었던 자유와 해방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 화가이자 조선 최초로 대규모 서양화 전시회를 열었던 눈부신 신여성 나혜석에게조차 자유연애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고 시절부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수많은 연애편지를 읽으며 자신은 그런 열정적인 마음에 화답할 수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그녀의 진정한 꿈은 멋진 남자와의 동화 같은 연애와 결혼이 아니라 화가로서의 무한한 성장과 예술가로서의 독립이었다.
좀처럼 남성에게 의미 있는 눈길을 보내지 않았던 나혜석에게 드디어 운명처럼 찾아온 첫사랑은 촉망받는 유학생, 최승구였다. 동경 유학 시절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공교롭게도 최승구 역시 기혼이었다. 그에게는 조혼한 아내가 있었다. 자유연애 과정에서 ‘신여성 vs 기혼남성(조혼)’의 구도는 흔했고, 여성은 항상 불리한 입장이었다. 신여성은 미혼에 한창 공부하는 학생이거나 꿈많은 젊은 여성인 반면, 상대는 조혼한 아내와 자식을 고향에 두고 있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이다. 남성들은 의무감으로 고향의 아내에게도, 자유연애 대상인 신여성에게도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는 남성은 흔치 않았다.
남성들은 대부분 신여성과의 자유연애에서 오는 장점(자유와 해방, 정서적이고 지적인 만족감)과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 모두를 누렸고, 신여성들은 결국 버려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결코 그런 길을 원하지 않았던 최승구는 감정적인 유대가 전혀 없는 아내와 이혼하고 싶어 했으나 이혼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폐병에 걸리고 만다. 나혜석은 아버지의 거듭된 외도와 축첩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아픔을 보았기에 자신은 결코 다른 여성에 대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혜석에게 최승구는 첫사랑이었고, 최승구는 폐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애타게 나혜석을 찾았다.
최승구의 형이 아우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나혜석에게 전보를 쳤을 때, 마침 학교에서 중요한 시험을 준비 중이던 나혜석은 갈등을 느끼지만 전보에 담긴 사연의 급박함을 이해하고 어렵사리 최승구의 고향을 찾아간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나혜석을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어 했던 최승구는 그녀를 보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한다. 나혜석은 최승구가 반드시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간호를 하다가 시험 때문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고,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최승구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듣게 된다.
진정한 자유연애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나혜석은 쇼크 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이 제대로 간호를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다가 훗날 남편이 될 김우영을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렸던 최승구와의 연애와 달리, 김우영과의 연애는 처음에는 일방적이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집안에서 계속되는 결혼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김우영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남성에게 모든 주도권을 양보할 나혜석이 아니었다. 당시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내건 ‘결혼 계약’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혼인계약서라는 것을 쓰는 사람도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서약이 오직 ‘남성이 여성에게 지켜야 할 약속들’이라는 것이 더욱 파격적이었다.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요구한 결혼 서약은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연애와 결혼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요구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혼 후 이혼한 과거가 있는 김우영의 전처가 낳은 딸을 자신이 키우지 않겠다는 내용, 시집살이를 결코 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데 어떤 방해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 그리고 지금처럼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철저히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달라는 선언이었다.
▲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컬처링, (사)한국여성연구소
게다가 그녀의 신혼여행지 또한 상상을 뛰어넘는 장소였다. 결혼 며칠 전까지 신혼여행 장소를 남편 김우영조차 몰랐다. 일단 김우영에게는 신혼여행지 결정권이 없었다. 어디로 신혼여행을 갈지 철저히 비밀로 하다가, 결국 결혼 당일 밝혀진 신혼여행지는 놀랍게도 ‘첫사랑의 무덤’이었다. 첫사랑 최승구가 묻힌 장소로 신혼여행을 가자는 이 도발적인 제안을 김우영은 받아들인다. 그만큼 나혜석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비석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초라한 무덤 앞에서 나혜석은 최승구와 나눈 편지를 모두 태우고, 최승구와 진정한 작별 인사를 나누며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연애와 결혼을 감행했던 나혜석은 결국 최린과의 연애 사건 이후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고 아이들도 만나지 못한 채 평생 전국을 떠도는 비극적인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신여성과 자유연애는 싱그러운 첨단의 유행을 떠올리게 하는 참신한 기표였지만, 그 기표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여성들은 결코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도 여성들은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가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토킹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심각한 남녀차별의 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어떤 남성 앞에서나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도 어렵지만,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험난한 투쟁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자유연애가 가능하려면 우선 여성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 나아가 여성 자신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여성은 예뻐야 하고, 다소곳해야 하고, 싹싹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싸우는 여성들, 남성의 재력이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가꾸려는 여성들, ‘연애하지 않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여성들의 용기에 더욱 큰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진정한 자유연애는 과연 언제쯤 시작될 수 있을까.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17&cid=2355919 <신여성과 자유연애>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