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여행의 시작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가 회중시계를 바라보는 일러스트
ⓒHulton archive | Culture club / Gettyimages
어려서부터 시계를 갖고 싶었다. 내 마음에 드는 시계, 나를 표현해 줄 수 있는 시계, 시간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고 손목 위에다 예술 작품을 얹은 것처럼 아름다운 시계를 갖고 싶었다. 나만의 시계를 갖는 데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시계의 가격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이었다. 몇만 원 하는 시계도 많았지만, 내 마음에 꼭 드는 시계를 사려면 몇십 만 원 혹은 몇백 만 원의 돈을 들여야 했다. 남자의 성공을 상징하는 장식품이 시계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그저 아름다운 시계 하나를 갖고 싶었을 뿐인데, 손목에 시계를 차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기자로 잠깐 일할 때 청담동에 있는 수입 명품 가게의 직원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다른 항목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한 가지 답변만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여자 손님은 가방을 보고, 남자 손님은 시계를 본다.”는 답이 많았다. 가방과 시계를 보면 그 사람의 씀씀이를 알 수 있다는 얘기였다. 가방과 시계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만의 시계를 갖기 힘들게 된 두 번째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내 몸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게 있는 걸 참기 힘들었다. 반지도 낄 수 없었고, 시계도 불편했다. 손목 시계를 좋아하지만 시계를 차면 말도 못하게 불편했다. 수갑을 찬 것 같았다. 익숙해지면 나을 줄 알았는데 평생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름이 되어 땀이 차면 시계를 벗고 다니는 때가 더 많았다. 시계를 자주 잃어버렸고, 잃어버릴 때마다 새로운 시계를 탐냈다. 클래식한 정장 시계, 스포츠 시계, 디자이너와 합작한 시계 등 지금까지 몇 개의 시계를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덕분에 비싼 시계를 사지 않게 됐다. 시계를 사면서 이미 시계를 잃어버릴 걱정을 한다. 시계를 사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물건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지만 끝없이 집착하게 되는 물건.
최근에는 스마트 워치에 꽂힌 상태다. 스마트 워치는 휴대전화기와 연결해서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시계다. 시간도 볼 수 있고, 메시지나 전자우편을 미리 볼 수도 있고, 맥박을 잴 수도 있다. 메시지나 전자우편은 휴대전화기로 볼 수 있고, 맥박은 굳이 재서 뭐하나 싶고, 다른 기능들도 반드시 꼭 필요한 기능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기한 기능들이 많다. 물건들이란 대부분 그런 게 아닌가. 꼭 필요해서 산다기보다 사고 나서 필요를 찾게 되는 것들.
시간 여행이 가능한 시계
▲애플 워치 - 2016년 3월, 애플의 CEO인 팀 쿡이 애플 워치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Justin Sullivan/ Gettyimages
여러 가지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다가 ‘애플 워치’라는 종착점에 이르렀다. 애플 워치의 사랑스러운 점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시간이 한참 모자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능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시간 여행’이라는 기능이다. 이 기능은 잘 설명하기가 힘들다. 애플 워치에 붙어 있는 시계의 태엽을 돌리면 시간이 움직인다. 시간을 앞으로 돌릴 수도 있고, 뒤로 돌릴 수도 있다. 3시간 후의 날씨가 알고 싶다면 시계를 3시간 후로 돌리면 된다. 달 모양의 시계를 선택한 후 태엽을 돌리면 시시각각 변하는 달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우주의 옵션을 선택하고 태엽을 돌리면 태양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특별한 기능이 아니다. 몇 시간 후의 기온과 며칠 후 달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일 뿐이다.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파고처럼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자주 시계의 태엽을 돌려 시간을 움직여본다.
아마 ‘시간 여행’ 기능은 앞으로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정밀한 데이터를 이용해 스포츠 게임의 스코어를 예측할 수도 있겠고, 과거로 돌아가 1년 전 나의 몸 상태는 어땠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 ‘시간 여행’ 기능을 기획하라면, 반드시 넣고 싶은 기능이 한 가지 있다. 랜덤 기능을 이용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거다. 휴대전화의 다른 어플리케이션에서 비슷한 기능을 본 것 같기도 하지만, 손목 시계를 통해 새로운 시간으로 이동한다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 2034년 내가 바라볼 풍경을 손목 시계가 보여주고, 2001년에 내가 읽었던 소설을 보여주고, 2018년에 내가 느낄 떨림을 미리 알려준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여행이 될까.
인간의 삶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더 많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삶이 길어지는 게 마냥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소년기나 청년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선 노년기만 길어지는 게 아닌가. 미다스 데커스는 『시간의 이빨』에서 고양이와 인간의 삶을 비교했다. 고양이의 삶은 중앙이 넓고 평탄한 모양이다. 새끼 고양이 시절이 짧고, 늙은 고양이의 시절도 짧다. 새끼 고양이는 한눈에 알 수 있고, 늙은 고양이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젊은 고양이가 얼마나 젊은지는 알 도리가 없다. 4살 고양이인지 10살 고양이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네덜란드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자인 미다스 데커스의 저서
ⓒ영림카디널
“고양이는 그들 삶의 5분의 4 동안은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한다. 이들과 비교하면 인간의 삶에서 생산적인 시기는 짧은 편이다. 인간은 보통 20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60살에 직장을 그만두는데, 직장에 다니지 않는 시기가 전체 삶의 거의 반이다. (중략) 고양이는 늙을 때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마치 어린 고양이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가 노끈을 흔들거나 털실뭉치를 던져주면 달려들어 재롱을 부린다. 사냥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이러한 행동을 고양이는 평생 동안 간직한다. 하지만 인간의 어린아이들은 전혀 다르다. 인간이 성장하면 더 이상 어린시절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오랫동안 어린아이로 머물기를 원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성장한다.” 유년기가 짧고 청년기가 길고 노년기가 짧은 게 고양이의 삶이라는 얘긴데, 청년기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부러운 삶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청춘은 60세부터’라는 구호도 생겨났지만, 고양이의 청춘에 비하면 성에 차지 않는 청춘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체력을 청년의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늙지 않는 비법을 발견해내지 않는 이상, 인간의 노년기가 한없이 길어지는 걸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미드나잇 인 파리 -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더블앤조이 픽쳐스/(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체력적으로는 고양이의 청춘에 완패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에게는 나름의 생존 비법이 있다. 나는 손목 시계야말로 청춘을 연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손목 위에 있는 시계의 다이얼을 마음껏 돌려보자.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미래로도 갈 수 있다.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자정마다 과거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곳에 가서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콜 포터를 만난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단편 소설 「달의 왕」에는 기묘한 허리띠가 등장한다. 허리띠를 허리에 차기만 하면 모든 시대의 여성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 여행’을 상상했고, 문학 혹은 영화로 여행을 실현시켰다. 과거와 미래를 들락거리며 무수히 여러 종류의 시간을 여행하다보면, 현재의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생물학적인 ‘노인’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인 ‘노인’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손목 위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할 수 있다.
‘시간 여행’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묘하다. ‘여행’은 공간과 관련된 단어라서, 시간과 붙어 있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세종대왕과 오바마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랩을 들으면서 초가집 지붕에 덮을 새끼줄을 꼬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색하기 때문에 새롭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시간은 직선처럼 보이지 않는다. 2차원의 선같이 느껴지던 시간이 3차원의 도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배회하며 여행하다 갑자기 죽음에 이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애플 워치의 ‘시간 여행’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시간들을 여행하는 중이다.
김중혁
1971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2000년 『문학과사회』에 중편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소설집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일층, 지하 일층』,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장편소설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 『모든 게 노래』, 『메이드 인 공장』 등을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39&cid=101713 <청년의 물건 : 시계, 여행의 시작>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시계, 여행의 시작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가 회중시계를 바라보는 일러스트
ⓒHulton archive | Culture club / Gettyimages
어려서부터 시계를 갖고 싶었다. 내 마음에 드는 시계, 나를 표현해 줄 수 있는 시계, 시간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고 손목 위에다 예술 작품을 얹은 것처럼 아름다운 시계를 갖고 싶었다. 나만의 시계를 갖는 데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시계의 가격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이었다. 몇만 원 하는 시계도 많았지만, 내 마음에 꼭 드는 시계를 사려면 몇십 만 원 혹은 몇백 만 원의 돈을 들여야 했다. 남자의 성공을 상징하는 장식품이 시계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그저 아름다운 시계 하나를 갖고 싶었을 뿐인데, 손목에 시계를 차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기자로 잠깐 일할 때 청담동에 있는 수입 명품 가게의 직원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다른 항목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한 가지 답변만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여자 손님은 가방을 보고, 남자 손님은 시계를 본다.”는 답이 많았다. 가방과 시계를 보면 그 사람의 씀씀이를 알 수 있다는 얘기였다. 가방과 시계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만의 시계를 갖기 힘들게 된 두 번째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내 몸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게 있는 걸 참기 힘들었다. 반지도 낄 수 없었고, 시계도 불편했다. 손목 시계를 좋아하지만 시계를 차면 말도 못하게 불편했다. 수갑을 찬 것 같았다. 익숙해지면 나을 줄 알았는데 평생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름이 되어 땀이 차면 시계를 벗고 다니는 때가 더 많았다. 시계를 자주 잃어버렸고, 잃어버릴 때마다 새로운 시계를 탐냈다. 클래식한 정장 시계, 스포츠 시계, 디자이너와 합작한 시계 등 지금까지 몇 개의 시계를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덕분에 비싼 시계를 사지 않게 됐다. 시계를 사면서 이미 시계를 잃어버릴 걱정을 한다. 시계를 사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물건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지만 끝없이 집착하게 되는 물건.
최근에는 스마트 워치에 꽂힌 상태다. 스마트 워치는 휴대전화기와 연결해서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시계다. 시간도 볼 수 있고, 메시지나 전자우편을 미리 볼 수도 있고, 맥박을 잴 수도 있다. 메시지나 전자우편은 휴대전화기로 볼 수 있고, 맥박은 굳이 재서 뭐하나 싶고, 다른 기능들도 반드시 꼭 필요한 기능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기한 기능들이 많다. 물건들이란 대부분 그런 게 아닌가. 꼭 필요해서 산다기보다 사고 나서 필요를 찾게 되는 것들.
시간 여행이 가능한 시계
▲애플 워치 - 2016년 3월, 애플의 CEO인 팀 쿡이 애플 워치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Justin Sullivan/ Gettyimages
여러 가지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다가 ‘애플 워치’라는 종착점에 이르렀다. 애플 워치의 사랑스러운 점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시간이 한참 모자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능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시간 여행’이라는 기능이다. 이 기능은 잘 설명하기가 힘들다. 애플 워치에 붙어 있는 시계의 태엽을 돌리면 시간이 움직인다. 시간을 앞으로 돌릴 수도 있고, 뒤로 돌릴 수도 있다. 3시간 후의 날씨가 알고 싶다면 시계를 3시간 후로 돌리면 된다. 달 모양의 시계를 선택한 후 태엽을 돌리면 시시각각 변하는 달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우주의 옵션을 선택하고 태엽을 돌리면 태양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특별한 기능이 아니다. 몇 시간 후의 기온과 며칠 후 달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일 뿐이다.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파고처럼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자주 시계의 태엽을 돌려 시간을 움직여본다.
아마 ‘시간 여행’ 기능은 앞으로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정밀한 데이터를 이용해 스포츠 게임의 스코어를 예측할 수도 있겠고, 과거로 돌아가 1년 전 나의 몸 상태는 어땠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 ‘시간 여행’ 기능을 기획하라면, 반드시 넣고 싶은 기능이 한 가지 있다. 랜덤 기능을 이용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거다. 휴대전화의 다른 어플리케이션에서 비슷한 기능을 본 것 같기도 하지만, 손목 시계를 통해 새로운 시간으로 이동한다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 2034년 내가 바라볼 풍경을 손목 시계가 보여주고, 2001년에 내가 읽었던 소설을 보여주고, 2018년에 내가 느낄 떨림을 미리 알려준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여행이 될까.
인간의 삶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더 많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삶이 길어지는 게 마냥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소년기나 청년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선 노년기만 길어지는 게 아닌가. 미다스 데커스는 『시간의 이빨』에서 고양이와 인간의 삶을 비교했다. 고양이의 삶은 중앙이 넓고 평탄한 모양이다. 새끼 고양이 시절이 짧고, 늙은 고양이의 시절도 짧다. 새끼 고양이는 한눈에 알 수 있고, 늙은 고양이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젊은 고양이가 얼마나 젊은지는 알 도리가 없다. 4살 고양이인지 10살 고양이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네덜란드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자인 미다스 데커스의 저서
ⓒ영림카디널
“고양이는 그들 삶의 5분의 4 동안은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한다. 이들과 비교하면 인간의 삶에서 생산적인 시기는 짧은 편이다. 인간은 보통 20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60살에 직장을 그만두는데, 직장에 다니지 않는 시기가 전체 삶의 거의 반이다. (중략) 고양이는 늙을 때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마치 어린 고양이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가 노끈을 흔들거나 털실뭉치를 던져주면 달려들어 재롱을 부린다. 사냥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이러한 행동을 고양이는 평생 동안 간직한다. 하지만 인간의 어린아이들은 전혀 다르다. 인간이 성장하면 더 이상 어린시절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오랫동안 어린아이로 머물기를 원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성장한다.” 유년기가 짧고 청년기가 길고 노년기가 짧은 게 고양이의 삶이라는 얘긴데, 청년기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부러운 삶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청춘은 60세부터’라는 구호도 생겨났지만, 고양이의 청춘에 비하면 성에 차지 않는 청춘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체력을 청년의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늙지 않는 비법을 발견해내지 않는 이상, 인간의 노년기가 한없이 길어지는 걸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미드나잇 인 파리 -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더블앤조이 픽쳐스/(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체력적으로는 고양이의 청춘에 완패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에게는 나름의 생존 비법이 있다. 나는 손목 시계야말로 청춘을 연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손목 위에 있는 시계의 다이얼을 마음껏 돌려보자.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미래로도 갈 수 있다.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자정마다 과거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곳에 가서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콜 포터를 만난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단편 소설 「달의 왕」에는 기묘한 허리띠가 등장한다. 허리띠를 허리에 차기만 하면 모든 시대의 여성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 여행’을 상상했고, 문학 혹은 영화로 여행을 실현시켰다. 과거와 미래를 들락거리며 무수히 여러 종류의 시간을 여행하다보면, 현재의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생물학적인 ‘노인’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인 ‘노인’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손목 위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할 수 있다.
‘시간 여행’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묘하다. ‘여행’은 공간과 관련된 단어라서, 시간과 붙어 있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세종대왕과 오바마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랩을 들으면서 초가집 지붕에 덮을 새끼줄을 꼬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색하기 때문에 새롭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시간은 직선처럼 보이지 않는다. 2차원의 선같이 느껴지던 시간이 3차원의 도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배회하며 여행하다 갑자기 죽음에 이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애플 워치의 ‘시간 여행’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시간들을 여행하는 중이다.
1971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2000년 『문학과사회』에 중편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소설집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일층, 지하 일층』,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장편소설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 『모든 게 노래』, 『메이드 인 공장』 등을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에 따라 <출처: 인문360>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39&cid=101713 <청년의 물건 : 시계, 여행의 시작>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