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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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히스토리쿠스 : 왜 하필 그 날, 그 장소였는가 - 리스본 대지진

2021-04-09
왜 하필 그 날, 그 장소였는가 - 리스본 대지진

 

1755년 11월 1일, 이날은 기독교의 축일 중 하나인 만성절(기독교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이었다. 당대 유럽에서 가장 종교적인 도시 중 하나로 추앙받던 리스본에서는 성대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시내의 각 성당은 경건한 신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날씨는 화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점으로 유럽 세계의 번영을 상징하는 이 도시는 신의 축복을 증명하는 듯 어느 때보다 완벽해 보였다. 미사가 막 시작된 오전 9시 30분, 리스본 밖 수백 킬로미터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9.0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파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곧바로 리스본을 관통했고,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은 몽땅 깨져 신자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신을 찬양하는 기도 소리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뒤바뀌었고, 비명이 가시기도 전에 S파가 덮치며 더 큰 진동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내진 설계의 개념 따위는 없었던 리스본의 건물들은 힘없이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이 잔해에 깔려 희생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미사를 위해 켜놓은 촛대들이 쓰러지면서 도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를 피한 리스본 시민들은 화마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몇 분 사이에 덮친 여진은 이런 저항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리스본 시가지는 이미 지옥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연속된 재앙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항구를 향해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이 항구에서 목격한 것은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었다. 15m에 달하는 거대한 해일이 리스본을 덮친 것이다.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리스본에는 타다 남은 시체와 잔해들만이 남았고, 절반에 가까운 리스본 시민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이 비극을 마주해야 할 인과적 원인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말이다.

 

훗날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켄드릭은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5세기 로마 몰락 이래 가장 큰 충격’이라 정의한 바 있다. 이런 평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 대재앙을 통해 기독교 사회의 전통적 사고방식, 이른바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한 신’이라는 신념이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 과거 서구 사회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신의 섭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 인물이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로, 그는 『변신론』을 통해 “이 세계가 가능한 한 선한 공간이며, 그럼에도 발견되는 악은 회화(繪畫) 작품의 명암처럼 선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수단”이란 논리를 내세운 바 있다. 즉 자연재해와 같은 ‘자연적 악’은 더 큰 선을 구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의를 통해 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임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근본적 역설을 해명할 수 있었다.

 

일례로 1692년 자메이카 포트로열에서 발생한 대지진 때 포트로열의 3분의 2가 카리브해 아래로 가라앉고 도시 인구의 절반가량이 사망했으나, 유럽인들이 포트로열에 보낸 시선은 동정이나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포트로열은 당대 가장 유명한 해적들의 소굴이었고 신대륙의 소돔이라 불릴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포트로열의 대지진이 타락한 도시에 대한 마땅한 응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60여 년 뒤에 벌어진 리스본 대지진은 상황이 달랐다. 이곳은 포트로열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민 열 명 중 한 명이 성직자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득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하면 애교 수준인 도시 구석의 홍등가마저 용납하지 못해 자신들을 채찍질하던 곳이 바로 리스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지진 당시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은 곳이 이 홍등가였다. 유수의 성당이 무너지고 경건한 신자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종교적 죄인으로 지탄받던 포주와 매춘부들만이 상대적으로 무사했던 것이다. 물론 홍등가가 모여 있던 알파마 지구가 대서양에서 떨어져 있었고, 이곳의 인구 및 건물 밀집도가 낮았기에 나타난 결과였으나,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선한 자가 죽고 죄인들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다른 날도 아닌 만성절에!

 

João Glama Strobërle,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리스본 국립고미술관 소장)

▲ João Glama Strobërle,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리스본 국립고미술관 소장)

 

유럽은 거대한 혼란에 빠졌다. 대체 신에게 어떤 원대한 계획이 있기에 만성절 날 자신을 경배하는 리스본 시민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인가? 그들이 죄인이어서? 그럼 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의 원죄는 그토록 깊은 것인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그렇다면 종교란 게 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당대의 교황청은 이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할 수 없었다. 반면 계몽주의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볼테르는 『캉디드』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웃었고, 임마누엘 칸트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지진의 원인을 규명하려 했다(칸트의 노력은 지진학의 시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소수의 철학자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악의 문제’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고, 유럽의 철학은 영원히 뒤바뀌었다. 리스본 대지진을 통해 신의 권좌가 산산이 부서지고 계몽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만약 지진이 1755년 11월 1일이 아닌 다른 날에 일어났다면, 리스본이 아닌 파리나 런던에서 일어났다면, 하물며 피해 규모가 조금만 덜했다면 역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라졌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다만, 리스본 대지진이란 우연적 사건이 없었다면 역사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을 거라 결론 내리는 건 성급한 처사다. 르네상스와 17세기의 종교개혁 등을 통해 이미 유럽 사회는 중세 시대와는 다른 발전구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리스본 대지진 이전에도 이성을 통해 사회를 파악하려는 거대한 흐름은 분명 존재했다. 애초에 이전 시대의 토양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볼테르나 칸트, 그 외 수많은 계몽주의자의 결과물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없었다면 리스본 대지진은 역사가 아닌 하나의 사건 정도로만 남았을 것이다.

 

즉 리스본 대지진은 분명 세계를 뒤흔든 충격이었으나 이 충격을 가능케 만든 것은 일시적 피해규모가 아닌 이전부터 내려오는 거시적 개연성이었다. 그리고 역사학은 가능성이 아닌 개연성에 더 많은 노력을 할애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E. H 카가 말한 “역사가(historian)와 역사적 사실 수집가(the collector of historical facts)를 구분하는 지점”이다.

한국전통문양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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