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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빈 공간 -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위치 : 예술027

저자/아티스트 : 피터 브룩 (지은이), 이민아 (옮긴이)

출간일(출시일) : 2019-08-01

ISBN13 : 9788993818994

출판사(제작사/출시사) : 걷는책

목차 :

1장 죽은 연극
2장 성스러운 연극
3장 거친 연극
4장 살아 있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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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십대 후반부터 94세를 맞은 2019년에 이르기까지 늘 새로우면서도 철저히 현실에 뿌리내리려는 연극의 길을 쉼 없이 걸어온 전설적인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의 저서. 1968년에 출간한 이래 전문 연극인뿐만 아니라 연극 애호가, 작가, 예술가 들의 필독서가 된 그의 대표작이다.

책소개 : 십대 후반부터 94세를 맞은 2019년에 이르기까지 늘 새로우면서도 철저히 현실에 뿌리내리려는 연극의 길을 쉼 없이 걸어온 전설적인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의 저서. 1968년에 출간한 이래 전문 연극인뿐만 아니라 연극 애호가, 작가, 예술가 들의 필독서가 된 그의 대표작이다.

저자가 당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극이 처한 현실과 문제, 나아갈 길 등에 대해 네 차례에 걸쳐 진행한 강연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현학적인 이론을 내세우기보다 살아 숨 쉬는 연극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 날카로운 통찰과 지혜가 곳곳에서 섬광처럼 번득인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 연극인뿐 아니라 급격히 희미해지는
예술의 생명력을 회복하려 애쓰는 모든 창작자에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일상에서 ‘만약’은 하나의 허구지만, 연극에서 ‘만약’은 실험이다.
일상에서 ‘만약’은 회피지만, 연극에서는 ‘만약’이 진실이다.
이 진실이 나의 이야기라고 설득될 때, 연극과 삶은 하나가 된다.
이것은 고원한 목표다. 엄청난 노동처럼 느껴진다.
연극은 고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노동을 놀이로 받아들일 때, 더는 노동이 아니다.
연극은 놀이다(A play is play).” ―본문에서


연극 연출의 살아 있는 전설, 피터 브룩의 대표작

십대 후반부터 94세를 맞은 2019년에 이르기까지 늘 새로우면서도 철저히 현실에 뿌리내리려는 연극의 길을 쉼 없이 걸어온 전설적인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Peter Brook, 1925- )이 1968년에 출간한 이래 전문 연극인뿐만 아니라 연극 애호가, 작가, 예술가 들의 필독서가 된 그의 대표작.
이 책은 지은이가 당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극이 처한 현실과 문제, 나아갈 길 등에 대해 네 차례에 걸쳐 진행한 강연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현학적인 이론을 내세우기보다 살아 숨 쉬는 연극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 날카로운 통찰과 지혜가 곳곳에서 섬광처럼 번득인다.
시의적절하고 절묘한 비유, 현장감이 약동하는 다양한 사례, 은근한 유머와 풍자적인 위트를 거침없이 쏟아내며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성큼성큼 건너다니는 이 책은 연극인들의 필독서가 되기에 한 점 아쉬움이 없다. 그에 더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단단한 사유가 비단 연극인뿐만 아니라 여타 예술 종사자들 및 수많은 예술 애호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는 지은이가 실험적인 연극으로 단순히 세상을 놀라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두 눈 부릅뜨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려 했던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관객층에게 손길을 뻗치려는 모든 시도에는 은근히 우리가 당신들한테 무언가를 베푼다는?‘너도 우리 파티에 와도 돼’ 하는?식의 시혜적인 태도가 스며 있으며, 시혜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이 행위에도 모종의 속임수가 숨어 있다. 그 속임수란 그것이 받을 가치가 있는 선물인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
문화나 예술이 단순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부가적인 요소로 치부되는 한 이러한 행태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 취급을 받는 한 우리 삶에서 언제든 분리할 수 있을뿐더러 분리하고 난 뒤에는 없어도 되는 무언가 될 게 뻔하다. …… 연극에서도 우리는 늘 같은 문제로 돌아온다. 연극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강박적인 필요를 작가나 배우만 느끼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관객도 이 절실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런 점에서 우리 연극인들의 고민은 그저 더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오게 만드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관객이 어떻게 해도 누그러뜨려지지 않는 허기와 갈증을 느끼게 할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힘들고 중한 일이다. (259-260쪽)


연극과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관통하며 핵심으로 돌진하는
‘죽은 연극’ ‘성스러운 연극’ ‘거친 연극’ ‘살아 있는 연극’


책에서 지은이는 당시 전 세계 연극계가 처한 위기를 낱낱이 해부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헤쳐 나갈 대안들을 제시하면서 편의상 크게 네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죽은 연극’ ‘성스러운 연극’ ‘거친 연극’ ‘살아 있는 연극’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 중첩되거나 대립하기도 하는 이 개념들을 다룬 각 장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론 격인 ‘1장 죽은 연극’에서는 고전극이든 현대극이든 불문하고 세계 곳곳에 포진한 ‘죽은 연극’의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며 당대 연극이 처한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2장 성스러운 연극’과 ‘3장 거친 연극’은 죽은 연극에서 벗어나고자 시도된 여러 연극인의 다양한 실험을 소개하는 장이다. 이 책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을 차지하는 마지막 4장 ‘살아 있는 연극’은 지은이가 겪은 생동감 넘치는 연극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살아 있는 연극이 되기 위해서 연극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나는 이 연극이라는 어휘를 각기 다른 의미로 ‘죽은 연극(Deadly Theatre)’ ‘성스러운 연극(Holy Theatre)’ ‘거친 연극(Rough Theatre)’ ‘살아 있는 연극(Immediate Theatre)’, 이 네 갈래로 나누어 논하고자 한다. 때로는 이들 네 종류의 연극이 실제로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혹은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나란히 상연되는가 하면, 바르샤바에서는 성스러운 연극이 상연되고 프라하에서는 거친 연극이 상연되는 식으로 전 세계 각지에서 각기 다른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또 이들 갈래는 은유적 의미로만 존재하기도 하는데, 하룻밤 공연의 한 장면 안에 두 가지 연극이 뒤섞여서 펼쳐지는가 하면, 때로는 한 순간 안에 성스러운 연극, 거친 연극, 살아 있는 연극, 죽은 연극, 이 네 갈래 연극이 한데 뒤섞인 경우가 그러하다. (11-12쪽)

이어, 각 장의 내용을 좀 더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1장 죽은 연극

‘죽은 연극’은 구태의연한 방식을 답습하는 고전극, 경극, 레퍼토리극, 오페라, 현대극 할 것 없이 온갖 형태의 연극에 나타날 수 있는 특성을 의미하며 이런 연극은 세계 도처에 산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렇게 죽은 연극을 양산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충분치 못한 예산, 연습 부족과 날림 리허설에서 기인한 판에 박힌 연기, 지나치게 비싼 표 값, 무성의한 평론과 평론가, 무비판적인 관객, 역량이 부족한 극작가와 연출가 등이 그런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마디로 연극을 살아 있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도처에 존재하며 연극의 숨통을 조여 가고 있다고 본다.

죽은 연극은 그 명칭만 봐서는 나쁜 연극처럼 느껴지므로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흔히 봐왔던 형태의 연극, 그러니까 사방에서 두루 경멸되고 공격받는 상업적 연극인 까닭에 비판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죽은 연극의 속성이 기만적이며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쪽)

연극을 죽은 연극으로 만드는 요소는 우리 사회의 문화 구조 속에, 우리가 물려받은 예술적 가치 속에, 경제적 구조 속에, 배우의 생활 속에, 비평의 기능 속에,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27쪽)

우리는 죽은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는 결코 연극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죽은 연극은 살아 있으나 활기라고는 없는 연극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변화의 잠재력이 있다. 이 변화로 가는 첫걸음은, 현재 세계 전역에서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조치가 한때는 의미로 충만했던 말을 어설프게 흉내 낸 광대극에 불과하다는,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73쪽)

2장 성스러운 연극

‘성스러운 연극’은 ‘죽은 연극’에서 벗어나고자 시도되고 있는 연극의 한 흐름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사뮈엘 베케트, 프랑스 연극의 이단아 장 주네, ‘잔혹극론’으로 연극계의 각성을 촉구한 앙토냉 아르토, ‘가난한 연극’의 주창자인 폴란드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 무용가 머스 커닝햄, 유랑하는 연극 공동체 리빙 시어터 등의 활약상이 주로 언급된다.

아르토가 성스러운 연극을 탐구하면서 찾고자 했던 것은 절대의 세계였다. 아르토는 신성한 장소가 될 연극, 자신의 본성을 이끌어내 격렬한 무대 이미지를 끝없이 연속적으로 창조하는 배우와 연출가 들이 헌신하는 연극, 인간의 문제를 강력하고 즉각적인 이미지로 폭발시켜 어느 누구도 다시는 사소한 일화와 시시껄렁한 수다나 늘어놓는 연극으로 회귀하지 않게 만들, 그런 연극을 원했다. 그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전쟁이나 범죄의 몫이 될 요소들까지도 담아내는 연극을 원했다. 또한 관객에게는 방어벽을 전부 다 내려놓고 스스로 숭숭 구멍 뚫리고 충격에 빠지고 경악하며 겁탈당하는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체험에 몸을 맡기기를 원했으며, 그와 동시에 관객들이 이러한 연극적 체험을 통해 강력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기를 원했다. (101쪽)

베케트에게는 그들과는 아주 다른, 베케트의 관객이 있다. 어떤 지성의 장벽도 치지 않으며, 메시지를 분석하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 않는 베케트의 관객이 전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 그들은 막이 오르면 박장대소하고 고함을 치며 즐기다가 막이 내려가면 베케트와 함께 축하하는 사람들이다. 뭐라 설명이 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기쁨에 충만하여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는 베케트의 관객들은 시, 고귀함, 아름다움, 마법 등 온갖 수상쩍던 용어들이 그의 연극, 그의 비관적인 연극 속에서 다시금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112쪽)

폴란드에서는 혁신적인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가 이끄는 작은 극단이 성스러운 연극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연극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믿으며, 신비주의 의식에서 춤이나 음악이 그러하듯 연극도 자기성찰과 자아 탐구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요, 구원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보았다. ……
연기는 배우가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 보통 사람들이라면 감추고 싶어 하는 바를 내놓음으로써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다. 이 희생은 곧 배우가 관객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이렇게 볼 때 배우와 관객의 관계는 성직자와 신도의 관계와 닮았다. ……
하지만 그로토프스키는 가난을 하나의 이상으로 만들었다. 배우들은 자기 몸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인간이라는 도구와 무한의 시간을 가진 그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극단이라고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13-115쪽)

3장 거친 연극

‘거친 연극’은 이른바 ‘민중극’을 뜻한다. 고도의 형식미를 갖추었지만 관객의 가슴을 뛰게 만들지 못하는 정체된 연극은 예부터 민중극에서 수혈을 받아 새로워지곤 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연극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극작가인 셰익스피어, 체호프, 현대 연극의 거두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베를리너 앙상블의 연극 등이 거론된다.

언제나 시대를 구원하는 것은 민중극(popular theatre)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형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중극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단 하나의 요소는 거칢(roughness)이다. ……
‘거친 연극’은 민중 친화적인 연극으로, 인형극이라든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리스의 그림자극이 모두 여기에 들어간다. 거친 연극에는 고유한 스타일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 없다. 스타일도 여가가 있을 때 추구할 수 있는 법이다. 조악한 환경에서는 연극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혁명 행위가 된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125-127쪽)

물론 거칢에 힘을 더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러움이다. 불결함과 상스러움은 자연스러우며 외설은 즐겁다. 이들 요소와 함께 호화로운 볼거리가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하는 사회적 기능을 맡는다. 민중극은 본질적으로 반권위주의적이고 반전통적이며 허세와 가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란스러움의 연극이며, 소란스러움의 연극은 곧 박수갈채의 연극이다. (131쪽)

브레히트는 연극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브레히트는 또한 배우들과 관객 사이에 제4의 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배우가 추구하는 단 한 가지 목표는 관객으로부터 감정의 과잉 없이 지성적인 반응을 창출하는 것이며, 배우는 관객을 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브레히트가 낯설게하기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도 관객 개개인이 지닌 판단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는 일종의 정지 명령이다. 도중에 끊고 끼어들어 무언가를 불빛 앞에 갖다 대고 다시 생각해보라는 명령. 낯설게하기는 무엇보다도 관객에게 자기 머리로 생각하라고 호소하는 것인데, 성숙한 사고를 통해 스스로 이해가 될 때에만 무대에서 본 것을 받아들이는,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브레히트는 사람은 누구나 연극 안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낭만적 사고를 거부한다. (140쪽)

셰익스피어는 인간 본성의 수많은 층위를 꿰뚫어보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한 성취를 기술적으로 가능케 한 것은 상반된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뒤섞은, 거친 짜임새다. 알고 보면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특성은 스타일의 부재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170쪽)

4장 살아 있는 연극

이 장에서는 지은이가 생각하는 생동감 넘치는 연극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배우, 연기, 리허설, 극작가, 연출(가), 무대 디자인, 관객 등 연극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별로 대안이 될 만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앞의 세 장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 각기 다른 형태의 연극 전반을 다루면서 지은이가 겪고 느낀 바를 이야기했다면, 이 장에서는 지은이가 가장 잘 아는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는 시야를 좁혀 나의 인생과 경험 속에서 바라본 연극, 내가 이해하는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이는 내가 작업해온 현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며, 결론 역시 거기에서 나올 것이다. 나의 경험과 관점은 바로 그곳 현장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의 이야기가 국적, 생년월일, 출생지, 신체적 특징, 눈동자 색, 서명 등 내 여권에 적힌 모든 조항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 날짜와도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염두에 두시라고 부탁드린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이야기이며, 나는 여전히 고인 물 안에서 썩어가거나, 혹은 진화해가는 연극 안에서 계속해서 새 길을 모색하고 있다. 나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며,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이 책에서 내렸던 결론은 다시 미결 상태가 될 것이다. (194-195쪽)

삶에 꼭 필요한 연극이란 어떤 연극인가를 가장 충실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이미지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어느 정신 병원에서 진행하는 사이코드라마 프로그램이다. ……
어떤 종류가 되었건 간에 짧은 역할극에서 그들이 보이는 이른바 광기 어린 모든 행동을 파고들다 보면 그 바탕에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지극히 온전한 무언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러나 사이코드라마 모임을 실시한 현장에서는 누가 봐도 틀림없는 직접적인 효과가 발생했다. …… 무언가 더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 자유롭게 흐르는 듯했으며, 전에는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열려 모종의 관계가 움트는 것 같았다. 모임이 끝나 방을 나서는 그들은 모임을 하기 전의 자신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 문을 나서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해도 괜찮다. 살아 있음을 맛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다시 와서 또 하고 싶어 한다. 이 사이코드라마 시간이 그들에게는 삶의 갈증을 달래줄 오아시스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260-263쪽)

그러나 모든 연극이 다 운동은 아니고 모든 연극이 다 불안과 파괴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모두가 다 유행만 좇는 것은 아니다. 분명 긍정의 대들보 또한 세워지고 있는데, 그러한 성취는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시에 이루어지곤 한다. ‘죽은 연극’ ‘거친 연극’ ‘성스러운 연극’ 따위의 분류를 무색하게 만드는, 무대와 관객이 일체가 되는 집단적 체험의 순간들, 총체극적 경험의 순간들. 그 자체가 기쁨의 연극이자 카타르시스의 연극이며 축배의 연극, 탐험의 연극이요, 의미를 공유하는 연극, 궁극적으로 살아 있는 연극인, 귀한 경험의 순간들. (265-266쪽)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글이 쓰인 때는 1968년, 유럽과 영미권의 연극은 빈사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지은이는 통렬하게 지적한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지금, 저자가 지녔던 문제의식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을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연극 한 편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 현실이고, 안타깝게도 많은 순수예술 역시 비슷한 처지이다.
우리 모두는 연극, 음악, 미술, 뮤지컬, 무용 등 예술 작품을 조금씩이라도 감상하며 살아간다. 그런 예술 체험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연극(예술)을 창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에게도 예술이란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 하고 묻는다.

여기에서 문제는 다시 관객으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생기기를 원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라는가? 자기 안에 그러한 변화의 열망이 없는 관객이라면 연극이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할 필요도, 사각지대에 돋보기를 들이댈 필요도, 탐조등이 될 필요도, 대결과 충돌의 공간이 될 필요도 없다. 반면에 자신에게든 인생에든 사회에든, 혹은 이 전부를 향하여 변화를 요구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객이라면 신랄한 연극, 돋보기이자 탐조등의 연극, 충돌의 장이 될 연극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연극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뒤흔들어 놓을 자취를 간절히 필요로 하며, 그것이 자기 안에 오래도록 남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70-271쪽)

그런가 하면 ‘오늘 공연 좋았어’ 하는 말이 나오는 날이 있다. 극에 적극적인 흥미를 보이면서 구경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십분 발휘하는 관객을 만나는 날이다. 이런 관객이 배우에게 힘이 되는 조력자다. 이런 조력 속에서, 극에 몰입하여 배우와 함께 울고 웃는 관객의 열망과 집중한 시선 속에서, 반복은 비로소 재현으로 진화한다. ……
이렇듯 배우에게는 관객이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지만, 관객에게는 배우들이 서 있는 무대가 힘을 주는 조력자가 된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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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어판을 출간하며 《빈 공간》에 첫 출간 당시의 글 외 어떤 해설도 추가되지 않기를 원했다. 고령으로 인해 새로운 서문을 대신 한국 독자와 동료들의 지금과 앞날을 비는 축원을 보내왔다(책 6쪽).